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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성공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2)

(2011년 12월 17일)

 

B는 내 절친 중에서도 절친이다. 대학친구인 그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났다.

친구들에게도 잘 했지만, 부모형제들이나, 와이프와 자식들 그리고 처갓집에게 까지도 참 잘했다. 워낙 친하다 보니 그의 처갓집 식구들은 물론 그의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으며 그는 내 친한 고교 동창들은 그의 친구가 되었다.

 

생각도 깊어서 허튼 소리를 하지도 않았지만, 매사에 사려 깊은 그는 친구이자 인생의 조언자이기도 했다. 개봉동의 반지하 전셋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친구의 영향으로 나도 서둘러 몇 달 후 결혼했다. 그가 아들을 낳고 몇 달 후 나는 딸을 낳고 그가 딸을 얻은 몇 달 후 나는 아들을 얻었다.

 

명석한 두뇌의 그는 재테크에도 밝았다. 80년대 중반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 오금동에 주택조합을 했을 때, 그 골짜기에 누가 들어가냐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나 그는 20평대의 주택조합 아파트를 신청해 나중에는 꽤 큰 돈이 되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회사가 되었지만, 당시 그 회사에서 보너스 대신 준 주식을 다른 직원들은 처분하여 현금화 하기 바빴지만, 그는 처분은 커녕 동료들이 파는 주식을 사 모으기도 했다.

 

너무 영리한 탓일까? 그는 회사에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는 부장이고 이사고 간에 대학생 자녀를 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즉 어차피 때가 되면 쫓겨날 직장이니 쫓겨나기 전에 내가 먼저 관두겠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마침 자신의 보스였던 이사가 외국계 컴퓨터 회사의 한국지사장으로 가자 영업담당 전무로 따라 나섰다. 90년대 초반 친구의 능력으로 한국지사는 아시아에서 성장률 1위를 달성하기도 했는데, 그 보너스로 부부가 미국과 유럽, 남미로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다. 자동화 사업부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일하던 나는 룸살롱에서 우연히 그를 만난 적도 있었다.

 

통행금지는 없었지만 자정이면 유흥업소가 문을 닫아야만 했던 시절이라 자정무렵의 룸살롱 입구는 접대받는 사람과 접대하는 사람들의 인사로 분주했다. 속칭 '나라시'라고 불리는 개인 영업 택시를 불러 접대받는 사람을 태워보내면서 접대하는 사람은 90도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모습이 그 무렵 강남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었다. 다소 소란스런 분위기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뚜렷이 섞여 있었다. 고개를 돌아보니 내 친구 B가 시커먼 승용차 조수석을 향해 허리를 꺾은 채로 있었다. 나는 나대로 모회사 계약담당 과장을 접대했고, 친구는 친구대로 자기 회사 제품을 팔기 위한 접대를 했던 것이다.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다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금방 전후사정을 눈치챈 '민마담'이라고 불리던 여우가 자기 단골인 나와 내 친구를 영업이 끝난 룸살롱으로 다시 데려가 문을 걸어 잠근 채 양주 한 병을 서비스했고, 우리는 서로의 신세를 위로하면서 밤새 술을 마셨던 추억도 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회사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나기도 하고, 30명이 넘는 부서의 부서장으로서 권한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참 힘들었다. 사회는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의 문제로 시끄러웠던 때였다. 청문회가 열리고 그들의 비자금 문제가 연일 터져 나왔다.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을 부정한 방법으로 착취한 그들의 이야기로 모두들 '나도 먹어야겠다'는 분위기였다.


하다못해 납품을 보낸 직원들에게 연락이 왔다. 트럭의 기사는 화물을 빨리 내려야 한다고 아우성인데 자재창고의 경비가 문을 안 열어준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해먹는데 수억원 어치를 납품하면서 담배값도 안 내놓느냐는 거다. 어이가 없었지만 싸우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아까워 오만원, 십만원씩 주고 해결했었다.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자정이 넘어 택시를 타거나 대리운전을 시켜서 집으로 가는 길에 운전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곤 했다.


- 아저씨, 미안하지만 소리를 좀 질러야겠습니다.


-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야, 이 X같은 x새끼들아, 잘 쳐먹고 잘 살아라! 이 XX 놈들아!


그렇게 악을 쓰지 않고는 술자리에서 꾹꾹 눌러 참았던 화가 풀리지 않았다. 원가조사 담당과장, 계약담당 과장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형님, 이번 건만 잘 좀 처리해 달라'고 아부를 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들은 자기들 일인데도 오만하게 거들먹거렸다. 술을 좋아하는 나지만 그런 술자리는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소주를 한 병을 더 들이키고서도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계 초침소리에도,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이 왔고, 두통에 시달렸다. 내가 집에 있으면 집사람은 아이들을 단속했고 철부지 아이들까지 나 때문에 긴장해야 했다. '40대 사망률 1위'라는 신문기사가  남의 일이 아니었으며 돈도 싫고 만사가 귀찮았다. 어디론가 떠나서 새끼들을 데리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런 생활에서의 탈출을 꿈꿨고, 이런 부패한 나라를 떠나기 위해 이민을 결심했다.


2000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할 무렵,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유행이기도 했던 캐나다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데, 돈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묻는 내용이었다. 즉 캐나다로 전부 가져가야 할지 아니면 이자가 높은 한국에 두고 이자수입을 챙겨야 할지를 묻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이민은 생각하지도 말라고 극구 말렸다. 이민이란 늑대를 피해 호랑이를 만나는 일인데 무엇때문에 하려 하느냐고 강력히 충고하며 만류했었다.


그 친구는 내 충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결국 이민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이 지난 달에 결혼했다.

내 고교 친구들도 다섯 명이나 참석했다. 대학교수, 칫과의사, 건설업체 전무도 있지만 회사를 떠나 그럭저럭 사는 친구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9반에 같이 다녔던 친구들 11명이 꾸준히 만났었다. 한 명은 사고로, 다른 한 명은 지병으로 고인이 되었고, 한 명은 70년대 중반 파라과이로 농업이민을 떠났고 다른 친구는 80년대 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다른 한 명은 작년에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사고로 잃는 불행을 당했다. 즉 11명 중 다섯 명은 참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교 친구들과 함께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대학친구들도 많이 참석해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도 많았다. KT 부사장, 지식경제부(전 정보통신부) 국장, KBS, MBC 고위간부 등도 보였고, 힘들게 사는 친구들의 모습도 보였다. 40명의 입학동기 중에서 세 명이 이미 세상을 등졌다.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필리핀에서 사는 친구들도 있고 아직도 중동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다. 망막에 불치병이 생겨 눈이 먼 녀석도 있고, 상투를 틀고 수염을 길러 도인이 된 벗도 있다. 사회의 시각으로 성공해보이는 놈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놈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재수로 입학해서 낙제까지 했던 친구들이 오늘은 더 좋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거다.


그게 인생이다. 

사람이 살면서 실패하고 좌절할 때도 있지만 지금 웃을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성공한 것 처럼 보이고 돈푼 깨나 있어 보여도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그게 또 무슨 대수인가?

지금 이 순간 웃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그런 것이 인생인 것을...

 

<후기>

'Out of sight, out of mind' 라고 오랫동안 멀리 살아서 그런지 친구들도 옛날같지 않음을 느낍니다. 친구들 사정도 잘 모르니 그들과 대화를 해도 관심사가 어긋나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그들 또한 내 이야기에 흥미를 갖지 못하지요.

 

지난 주에 제 글을 읽은 어떤 분으로 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경제위기가 오기 전에 프랜차이즈 호텔을 인수했다고 하고, 미국에서 20년 동안 번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경제위기 속에서 매출이 40%나 떨어졌다고 합니다. 운이 없었던 거지요. 그래도 작년까지는 버텼는데 금년들어서는 그나마도 유지가 안돼 최악의 상황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Personal Guarantee까지 해서 집까지 잃게 된 절망적인 상태라고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지만, 인간사 새옹지마 라는 말로 위로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분으로 부터 다시 메일을 받았습니다.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에 급히 답장은 보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생활에 패배했더라도 인생에는 지지 말자고 당부했는데, 푸시킨의 시를 인용한 것이지요.

부디 그 분이 용기를 잃지 말고 최선의 선택을 하시기를, 그리고 부디 나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루종일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인생에서 경제적인 성공은 운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