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군주민수(君舟民水)

교수사회를 대변하기 위해 1992년에 창간되었다는 교수신문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12월 말에 그해를 대표하는 ‘4자성어(四字成語)’를 교수들의 투표로 결정하여 발표하고 있다. 시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만, 2016년을 정의하는 4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로 결정했다.


임금은 배, 백성은 물과 같아서 직접적인 의미는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는 것처럼 민심을 거스른 임금은 백성에 의해 끌어내려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3년 전 봄 진도 앞바다에서 뒤집혀 246명의 단원고 학생을 포함 304명이 사망했던 세월호 사건과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어 직무가 정지된 일련의 사태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2014년 ‘지록위마(指鹿爲馬)’와 2015년의 ‘혼용무도(昏庸無道)’는 글의 제목으로 삼아 글을 썼으니 이번 세 번째의 글이 되는 셈이다. 박근혜 정부의 첫 해였던 2013년에는, ‘순리(順理)를 거슬러 행동하다’는 뜻의 ‘도행역시(倒行逆施)’라고 한다. 따라서 박근혜 정권 4년을 교수신문에서 발표한 ‘4자성어’로 풀어보면, 순리를 거스르고,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져, 민심이 일어나 대통령을 탄핵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라의 지성인으로서 그들은 세상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교사도 아니고 대학교수라면 지성인 집단으로 인정해도 무리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본분을 지킬 때 가능하다. 명문 사립대 교수로 있는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지성인의 집단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수신문에 참여하는 교수가 8~900명 선이라고 하니 전체의 극히 일부분인 셈이다. 전체 300여 개의 대학에 100명씩만 잡아도 3만 명이나 되니까.


이화여대 사태를 초래한 최경희 총장이나 김경숙 학장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한가운데 있는 김종 차관, 안종범 수석, 김종덕 장관 등도 교수 출신이었다. 연구비와 교육부 혜택에 대한 욕심이 최경희와 김경숙을, 권력에 대한 과욕이 김종, 안종범, 김종덕을 만들었다. 나이도 적지 않은 5,60대 인물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지켰다면 명예를 지켰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죄수로 전락한 것은 욕심이라는 괴물을 탓할 수밖에 없다.


군주민수에서 주어는 ‘물(水)’과 ‘백성(民)’이다. 임금과 배는 물과 백성에 의해 만인지상으로 군림하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하는 대상이다. 물과 함께 연상되는 단어는 ‘순리(順理)’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순리인데, 순리라는 영어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사전에 찾아보니 명사는 없었다. ‘순리적으로’라는 부사를 ‘reasonably’로 번역했지만 정확하다고 보이지 않았다. ‘naturally’ 가 보다 가깝다고 생각되지만 이것 역시 부자연스럽다. 영어에는 없는 것을 보니 동양적 사고의 산물인 것이 틀림없다.


최근에는 들은 기억이 거의 없으나, ‘분수에 맞게 살아라!’ 거나 ‘순리대로 살아라!’는 말은 지난날 부모님이나 직장상사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충고였다. 젊었을 때는 이런 소리에 공감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은, 순리대로 살기엔 에너지가 넘쳤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을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보내는 역리(逆理)에는 동력이 필요하다. 사람의 힘으로 펌프질을 하거나 모터를 돌리는 전기 없이는 물을 높은 곳으로 보낼 수 없다. 순리는 외부의 힘이 없어도 되는데 반해, 역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기를 공부하던 시절에 곧잘 물에 비유해 전기를 설명했다. 예를 들어 전류는 물의 양이고 전압은 물의 높낮이라는 식으로 비유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 현상도 쉽게 이해된다. ‘군주민수’를 보고, 세상의 복잡한 현상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들의 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것은 순리이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힘없는 서민들의 힘든 삶을 돌보는 것이 순리다. 그런 이치가 합리적이고(reasonably) 자연스럽게(naturally) 흘러가도록 물길을 열어주는 것이 정치다.


지난 6년 동안 별 볼 일없는 은퇴자로 한국에 살면서 순리에 역행하는 많은 일들을 보고 느꼈다. 경기를 부양한다는 핑계로 부동산을 떠받치면서 부자들은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을 남발했다. 전세가 급격하게 오르자 집주인에게 유리하고 세입자에게는 불리한 전세금 대출제도를 만들었으며,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로 267명의 꽃다운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의 한(恨)을 다독이는 대신, 스스로 한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다. 역리에는 순리를 이겨낼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한데도 스스로의 힘이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2년 전 라오스를 여행하면서 이틀 동안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다.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보트의 모양이 독특했다. 라오스의 메콩은 강폭이 넓지 않은 탓인지 물살은 빠르고 거친 누런 황톳물이었다. 빠른 물살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다. 적은 동력으로 역리를 하려면 이렇듯 특별한 고안도 필요하다. 순리에는 크고 넓어도 괜찮지만 역리는 좁고 가늘어도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백성이라는 크나큰 집단을 역리로 이끄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한 생각이 아니었다. 


배는 이미 뒤집혔고 대통령도 결국 탄핵될 것이다.


▼ 메콩강을 오르내리는 배는 이렇게 생소하게 생겼다.


<후기>

지난 16년간 교수신문에서 정한 ‘4자성어’를 모았습니다. 그해 한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회상하면서 그 뜻을 생각해보면 치매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하하.


● 2001년: 오리무중(五里霧中): 깊은 안갯속에 들어서게 되면 동서남북도 가리지 못하고 길을 찾기 힘든       것처럼 무슨 일에 대해 알 길이 없음.

● 2002년: 이합집산(離合集散): 헤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다시 흩어짐.


● 2003년: 우왕좌왕(右往左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일이나 나아가는 방향이 종잡지 못함.


● 2004년: 당동벌이(黨同伐異):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한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무리의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

● 2005년: 상화하택(上火下澤): 위에는 불, 아래에는 못. 불이 위에 놓이고 못이 아래에 놓인 모습으로 사물들이 서로 이반하고 분열하는 현상을 상징.

● 2006년: 밀운불우(密雲不雨): 하늘에 구름만 빽빽하고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상태. 여건은 조성되었으나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이다.

● 2007년: 자기기인(自欺欺人):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이나 행동으 로 남까지 속이는 사람을 풍자한다.

● 2008년: 호질기의(護疾忌醫):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음. 문제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는 뜻의 사자성어이다.

● 2009년: 방기곡경(旁岐曲逕): 샛길과 굽은 길로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큰 길이 아니라는 뜻으로, 바른 길로 정당하게 일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으로 억지 추구함을 비유.

● 2010년: 장두노미(藏頭露尾): 머리는 겨우 숨겼지만 꼬리가 드러나 보이는 모습. 진실을 공개하지 않고 숨기려했지만 거짓의 실마리가 이미 드러나 보인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 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 자기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뜻. 자기가 나쁜 일을 하고도 잘못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비난을 듣기 싫어 귀를 막는 것을 의미함.

● 2012년: 거세개탁(擧世皆濁): 온 세상이 모두 탁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 있기 힘들다는 뜻.

● 2013년: 도행역시(倒行逆施):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으로,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나쁜 일을 꾀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