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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내가 보는 김영란 법

25년 전 쯤, 이민이라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놓고 숱한 나날을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던 처지인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외국에 대해 많은 정보가 흔하지도 않았던 때라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간첩이 접선하듯 몰래 정보를 주고받았었다. 불합리하고 권위적인 상명하복 식의 직장이 견디기 어려웠을 뿐, 모든 것은 그런대로 순조로운 인생이었다.


운 좋게도 30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분당이라는 신도시에 서른 평이 넘는 아파트도 당첨되어서 시간만 가면 내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질 수 있었고, (최근에는 신들도 다니고 싶어 하는 직장이라고 불리지만) 국영기업이었으니 신분이 보장되는 안정된 직장이었다. 게다가 본사의 젊고 유능한 과장이었으니 처세만 잘하면 부장 승진도 맡아놓은 당상이었다. (웬 자화자찬?)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까라면 까!’라는 식의 보스와 조직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할 수조차 없는 것이 절망감을 자아냈다. 그렇다고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무작정 쉽게 이민을 택할 수도 없었다. 이민을 선택하는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은 구실이 필요했다. 그렇게 찾은 합리화의 방법이 ‘부정부패’였다. - 이 소재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그동안 썼던 글에 이미 충분히 소개했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한다.


“선배, 아무리 나라가 썩었어도 교육과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하면 미래라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부패한 분야가 바로 그 교육과 언론이야! 그러니 미래에도 희망을 기대할 수가 없어요!” 이민을 함께 고민하며 점심시간에 후미진 곳에서 몰래 의견을 교환하던 후배의 한마디가, 내 가려운 곳을 정확히 짚어서 긁어주었다.


- 그래 바로 그거야!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라에 태어났으니 지금까지 살았지만, 내 새끼들만큼은 이런 부패한 나라에 살게 하지 않겠어!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민의 이유는 충분해. 그럼, 충분하고도 남지!


이렇게 스스로 정당성을 찾아 이민을 결정했고, 이민알선 업체를 찾아가 상담하고는, 결국 이민 보따리를 싸고 말았다. - 실제로는 그러고도 바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수속은 밟는 중에 자회사로 옮기는 선택을 했던 것은, 그만큼 이민이 두려웠고 신중을 기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새로 옮겨간 회사에서는 일하는 재미는 있었지만 더 큰 부패와 마주해야 했기에 결행하고 말았다.


한국은 지금 김영란 법으로 시끄럽다. 대법원 판사를 지낸 김영란 법관이 2012년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제의한 일종의 ‘부정부패방지법’으로, 2년간의 논의를 거쳐 작년 3월 압도적인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해서는 오는 9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가, 기자협회와 사립학교 교직원 단체 및 대한변호사협회 등이 제출한 위헌소송판결이 지난 28일에 있었던 것이 발단이다.


이에 대한 뉴스보도를 접하면서 관심을 끈 것은, 위헌소송을 제기한 집단에 기자협회와 사립학교 관계자가 있다는 것이다. 25년 전 후배가 지적한 바로 부패한 언론과 교육의 대명사가 아닌가. 기자와 변호사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망국론까지 거론되는 한국의 현실에서 사학재단은 한국사회의 대표적 ‘갑(甲)’이다. 그들이 ‘김영란 법’에 저항했다는 것은 무얼 뜻할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김영란 법은 미국에서 1960년대 제정된 ‘뇌물, 부당이득 및 이해충돌 방지법(Bribery, Graft and Conflict of interest Act)’을 흉내 낸 것이다. 법이 발의되고 국회에서 2년간 논의되는 과정에서 이 법은 부처 간 ‘이해충돌’ 조항이 빠지는 등, 이미 원안의 목적이 많이 상실되어 반쪽짜리 법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부당하게 취득한 이익이 줄어들게 될까봐, 혹은 지금까지 해오던 ‘갑질’ 관행에 문제가 생길까봐, 사회의 최상층 기득권들이 저항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언론의 작태는 더욱 꼴불견이다. 또 다른 기득권인 대기업들과 합세해서 경제를 해친다거나, 농·축·수산업이 위축되어 농어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아직 시행조차 하지 않은 법을 두고, 한정식 식당이 문을 닫았다는 얼토당토한 기사까지. 그야말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뻔뻔한 집단이다. 그런 기사에 현혹된 농어민들은, 시행도 되지 않은 법을 개정하라며 국회에서 농성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민으로 뉴질랜드와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바로 정직하고 깨끗한 사회이었다. 집으로 직접 찾아와 절세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던 뉴질랜드 공무원, 미국에서 300만 불을 넘는 거래업무가 팩스로 오가며 처리되던 화이저(Pfizer)와의 계약은, 한국에서만 살아온 내게 감동을 넘어 충격이었다.


미국에서 세관이라는 연방공무원으로 은퇴한 ‘제주아톰’님으로 직접 전해들은 내용도 부러움의 대상이다. 업무상 민원인을 자주 접하는 세관에게 허용되는 접대는 오로지 커피나 소다 같은 음료(Beverage)에 한한다는 거다. 세관으로 있으면서 적발한 모조품들은 전부 소각 처리하는데, 진짜나 다름없는 짝퉁 핸드백이나 시계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태우면서도 한두 개 빼내는 사람조차도 못 보았다고 전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경이로웠던 것에 공무원들의 친절과 깔끔함이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부패한 공무원이 더 이상 아니었다. 그러나 살아보니 또 깨닫는 것이 있었다. 말단 공무원들만 그랬다. 고위공무원이나 재벌, 언론, 사학재단 등은 ‘갑질’이라는 새로운 더 심한 부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갑질은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조국을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비아냥거림거리로 전락시켰다. 헬조선은 결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정하지 못한 사회가 원인이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의 가장 큰 동기가 바로 기득권들이 만든 자기들 리그 내에서 이루어지는 부패다. 넥슨의 오너 김정주, 구속된 지검장 진경준,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의 커넥션이 생생한 증거다. 김영란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이해충돌의 개념을 추가해서 더 강화되어야 하고, 이름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김영란 법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구출하는 법’이라고 개명되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조국이 더 이상 ‘헬조선’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이민 갔던 것을 더 많이 후회하도록 만들기 위해.


<후기>

만에 하나, 여론이 주장하는 대로 김영란 법 때문에 경제가 나빠지고 농어민이 해를 입는다면, 그래서 부정부패에 의해 유지되는 나라라면 그런 나라는 망해야 마땅합니다.


제가 그동안 살아온 경험에 바탕한다면,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그런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법이 대한민국을 한 레벨 업그레이드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단, 법이 왜곡되지 않고 확실히 지켜진다면 말입니다.


한국에서 골프를 쳤던 것도, 일주일에 서너 차례씩 룸살롱을 드나들었던 것도, 명절마다 최고급 갈비 세트와 여러 장의 금강구두 상품권을 받았던 것도, 비자금을 만들어 썼던 것도 전부 처벌받아야 마땅한 범죄행위였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누구나 당연하게 저지르는 보편적 행동이었지만 말입니다.


- 2016년 7월 마지막 날에 제주 우당 도서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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