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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나는 1등이 싫다!

한국에 돌아온 후 처음에는 TV의 모든 것이 재밌었다. ‘차마고도’와 같은 다큐는 물론이고 평소에 도외시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는 물론, 심지어 광고까지도 각별하게 흥미를 유발했다. 특히 ‘개콘’이라고 불리는 ‘개그 콘서트’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보았던 것도 그만큼 한국의 변화가 신기했고 그 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을지 모른다. 당연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보지 않는다.


그때 보았던 개콘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치는 코너가 있었다. 평범하게 생긴 낯선 코미디언이 술에 취한 채 파출소에 들어와,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이라던가, “1등만 좋아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치며, 한국사회의 ‘웃픈’ 현실을 꼬집었다. (註: ‘웃픈’은 웃기지만 슬프다는 인터넷 신조어) 그런데 이 코너가 없어진 것이, 이 프로를 보는 여당인사를 불편하게 했다는 거다.(관련기사 보기) 몇 년이 지난 이 프로가 다시 생각난 것은 요즘 한국에서 가장 핫한 뉴스의 중심에 있는 ‘진경준’과 ‘우병우’라는 인물 때문이다.


이 둘의 많은 공통점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띠는 것은 우리 민족의 수재 중의 수재요, 인재라는 것이다. 아니, 수재를 넘은 천재일 거다. 1967년생인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우병우는 만 20세인 1987년 대학 3학년 신분으로 사법시험 사상 최연소로 합격하여 23세부터 검사생활을 지냈으며, 2년 후배인 진경준 역시 3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행정고시까지 접수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이 초등학교부터 대학이나 사회에서까지 항상 1등을 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회계사만 돼도, 혹은 경찰서장만 돼도 고향에는 ‘경축, 아무개 아들 제 ○○회 회계사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붙는 한국에서, 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그 긍지와 자부심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게다가 1등만 기억한다는 한국사회가 아닌가!


1등을 차지한 인물답게 이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기관인 검찰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1등만 기억하고 인정하는 사회에서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았을까?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짐작조차 어렵다. 그러나 지난 60년 살아온 경험에 근거하고 그들이 저지른 행태를 미루어보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먼저, 내 경우를 되돌아본다. 다니던 회사에서 구조조정되기 전까지는 명퇴니 조퇴 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의 능력이라고 치부했고 그런 처지가 되었다 해도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취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둔한 머리 탓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당하고 난 후에야 같은 낙오자로서 그 처지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가 뛰어난 수재나 천재들을 어리석은 나와 비교하는 것이 어불성설인지는 몰라도, 1등으로 살아온 사람이 2등도 아니고 중간 등수에 드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기사 관련 사진진경준을 보면 보다 확실해진다. 20년 전, 그는 서른 살 젊은 검사로서 여름철 기차표를 샀다가 일반인에게 되팔아 4천원을 남긴 사람을 암표상이라며 구속할 정도로 정의감(?)이 투철했다.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난 후에는, 넥슨의 사주(社主)가 빌려준(?) 돈 4억 5천으로 그 회사의 비상장 주식을 취득해서 120억의 시세차익을 올렸다. 이것도 그가 검사장으로 승진하지 않았다면 밝혀지지 않을 사건이었다.


차관급에 해당하는 검사장은 ‘재산공개’를 수반하는 고위공직에 해당한다. 단지 4천원의 부당이익에 철퇴를 가했던 그가 126억이라는 요상(?)하게 형성된 재산을 신고하면서,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토록 좋은 두뇌를 가지고 그 쪽에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 전문가로서 말이다. 평생을 ‘1등’으로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이었을 거다. 자신이 하는 일은 ‘1등을 인정해주고 1등이 독식하는 사회’에서 관대한 것이 당연하고, 인생 낙오자나 다름없는 이류, 삼류인생들이 저지르는 일은 사소한 잘못이라도 관용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이중 잣대 말이다.


그런 진경준의 승진인사를 검증하는 자리에 있던,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우병우는 이런 진경준을 어떤 스크린도 하지 않고 승진시켰다. 이것은 무얼 뜻할까. 1등이라는 동등한 자격으로서 당연하다는 비슷한 생각은 아니었을까. ‘1등’끼리의 커넥션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비록 검사장 승진 문턱에서 탈락하고 변호사를 개업했었지만, 자신과 같은 ‘1등 부족(部族)’인 후배가 검사장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개콘의 영향만은 아닐 것이다.


끼리끼리 어울리려는 것은 인간의 습성이다. 신라시대에는 출신에 따라 성골, 진골을 따지는 ‘골품제도’가 있었고, 인도에는 옛날의 카스트 제도가 문명사회인 현재까지도 잔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성골과 진골이 평민과 함께 번영을 공유하려고 했을 때 가장 허약한 나라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고, 귀족들이 자신의 권력만 누리고 이·삼류들을 이용만 했을 때 진골, 성골의 지위만이 아니라 나라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인도는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남아있다.


‘노블레스 오블레주’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1등’이라는 자격 뒤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 보다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일단 거짓말과 변명으로 시종일관하려는 그들에게서 한국사회의 병든 모습을 본다. 병든 사회를 치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환부를 깊숙이 도려내고 좋은 약으로 새살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러나 환부를 검사하고 도려내야 할 의사들 역시 같은 ‘1등 부족’이라는 것이 문제다. 같은 종류의 전염병을 가진 그들이, 환부에 반창고만 살짝 붙인 채 가리기에만 급급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지금까지 비슷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한 때는 1등을 부러워하고 1등을 원했던 2·3류 인생이었지만, 이제 1등이 싫어졌다. 그들의 위선이 싫고, 그 뻔뻔함이 정말 싫다. 1등은 아니더라도, 그래서 패배하고 쓰러지더라도 인간냄새가 풋풋하게 풍기는 떳떳한 삶이 좋다.


<후기>

고3 시절 집근처 독서실에서 공부했던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독서실에 가면 보통 저녁 8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찌나 졸음이 쏟아지던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책상에 엎드려 잠깐 졸은 것 같은데 시간은 이미 새벽 한시나 두시가 되어 있더군요.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밥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던 한창 때이니 학교에서 돌아와 시장한 상태에서 얼마나 먹었겠습니까? 신진대사가 최절정이었던 시절이니 졸음이 오지 않으면 오히려 정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공부만 생각했다면 배불리 먹지 말아야 했지만, 그럴 정도로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앉아서 공부만 하는 고3생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경기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드름투성이 얼굴이었는데, 하루는 어디를 목표로 하는지 물어보았더니 서울대 상대 경제과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공부하는 자세는 제가 흉내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놀랍기만 했습니다. 결과는 모르지만 아마도 목표하는 곳에 진학했을 겁니다.


당연한 귀결로 저는 목표한 대학에 보기 좋게 낙방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도 서울대 나온 분들에게는, 존경의 의미로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울대 출신들이 정말 많더군요. 서울대 나온 분들 중에서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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