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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니스(Nice) 테러'에 대한 상념

“제주가 뭐 좋다고 사람들이 몰리고, 땅값이 그렇게 오르는지 모르겠어. 이거 뭐 잘못된 거 아냐?”


“듀크, 프랑스 남부 니스나 칸느 같은 지중해는 어떤지 알아? 연중 평균기온이 15도 정도니까 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이나 경치가 좋아서 백만장자가 아니면 집을 살 수가 없을 정도로 비싸거든. 게다가 여름이나 휴가철에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물가가 열 배나 비싸진다고!”


“뭐, 열 배! 두 배나 세 배가 아니고 열배라고? 너무 과장하는 거 아냐?”


“아냐, 정말야! 두 배, 세 배 아니고 열 배. 여름 관광시즌이 되면 그곳에 사는 주민들도 빵이나 우유 같은 생필품 쇼핑하기 위해서 내륙으로 몇 시간씩 운전한다니까. 내가 보기에는 제주도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니스처럼 두 부류로 나뉘는 거야. 우리처럼 원래 살던 거주민, 그리고 육지에서 이주한 부자들. 니스가 그렇거든.”


두 달 전에 제주를 방문한 ‘실콘짱’님과 함께, ‘쉐 올리비에’ 카페에 들렸을 때 카페 주인인 ‘버나드 올리비에’와 나눴던 대화의 일부다. 지중해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오리지날 프랑스 출신으로부터 듣고도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그렇다고 그렇지 않을 거라고 친구에게 우길 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한국에서 제주가 여름에는 덜 덥고, 겨울에는 덜 춥다고 하더라도 지중해와 비교할 만한 기후조건도 아니고, 섬이니까 니스에 버금갈 수 없을뿐더러 니스의 물가가 그렇게까지 살인적이라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버나드는 그렇게 제주를 니스에 비교했고, 그렇게 내 머릿속에 니스가 자리했다.


그런 니스에서 극단적인 테러가 자행됐다. 솔직히 프랑스가 왜 테러의 대상국이 되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서슬이 시퍼렇던 1979년 유신시대에 프랑스로 망명했던 홍세화 선생의 책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보면, 그야말로 ‘똘레랑스(tolerance의 프랑스 단어)의 나라’가 아니던가. 파리 테러가 발생하고 8개월만이다.


세계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테러가 요즘처럼 자주 발생했던 때가 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가 전하는 테러소식이 이제는 낯설지 않을 지경이다. 그리고 그런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애도의 물결 한 편으로는 증오가 뒤따르고 강력한 보복의 함성이 메아리친다. 그리고 그들의 손가락과 증오의 눈초리가 향하는 곳은 항상 같은 곳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인종.


테러에 대한 증오와 보복이 테러를 중단시키고 예방하는 길이었다면 테러는 벌써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지만, 오히려 더 자주 발생할 뿐만 아니라 방법까지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해지는 것을 보면, ‘증오와 보복’이 테러를 막는 최적의 방법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상대로 한 최악의 테러 ‘9/11’ 이후, 탈레반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축출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끝까지 찾아내어 살해한 미국의 응징은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테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민간 항공기가 테러의 무기가 되었던 것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검색대를 한 번 더 통과하고, 신발까지 벗어야 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 이번에는 대형 화물차가 테러에 이용되었다. 이제 또 어떤 불편함이 일상으로 찾아올지 알 수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온 것이 인류의 역사인 것은, 보다 만족할 만한 대응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피눈물이 나게 했으니, 너는 나보다 훨씬 찐한 피눈물을 맛봐라!’는 것이 대응논리다. 법치국가에서 지켜지는 형법도 사실 같은 논리다. 죄를 졌으면 죄 값을 받아야 하니까.


그러나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해지지 않는다. 아무 죄 없이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가 억울하게 죽었고, 내 민족이 핍박을 받으며, 내 종교가 박해를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억울함과 분함을 풀길이 없어진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으로 이라크 국민 16만 명이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억울하고 분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엔지니어로 평생을 살면서 시스템에 장애를 초래하는 많은 문제들을 만났다. 그 원인은 다 달랐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법은 항상 같았다. 그것은 장애나 문제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하고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해 없이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이해가 없이 증상만 고치면 재발은 언제나 시간문제였다. 문제의 원인이 운영하는 사람이든, 온·습도 같은 환경이든, 아니면 작은 부품이든,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이해의 대상이었을 뿐.


이해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다. 위(Over)에 서서(Stand) ‘증오와 보복’으로 해결하겠다는 자세보다는, 밑(Under)에 서서(Stand) 왜 테러를 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테러를 인류사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상념에 빠져본다.


<후기>

테러를 막기 위해 최첨단 과학이 동원되고 각종 감시와 통제가 실행되고 있어서, 고전적인 테러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며 하는 자살 테러까지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누구나 목숨은 소중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목숨은 자신의 것입니다. 세상을 다 가진다해도 자신의 목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테러를 하겠다는 그 마음은 어떤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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