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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시스템이 문제다 (5)

1999년 9월 초대형 허리케인 Floyd가 미동부 연안을 쓸고 북으로 올라와서는 뉴저지, 뉴욕 롱아일랜드까지 덮친 적이 있었다. 당시 직원이 6~70명 정도이었던 회사를 비좁았던 사무실에서 모리스타운의 큰 빌딩 넓은 사무실로 옮긴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쁘기도 했지만, 미국에 와서 허리케인은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텅빈 사무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이메일 서버만 제외하고, 모든 설비의 전원을 끈채 Black-out(정전)과 같은 예기치못한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가 늦게 퇴근했는데, 곳곳에 경찰들이 폴리스 라인을 치고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로컬 길로 가면 5분이나, 길어도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하이웨이로 돌아가느라고 30분이 넘게 걸렸다.


차로 지나가는데 별 지장이 없어보이는 물웅덩이에도 경찰차로 길을 막았고, 굵은 나뭇가지가 땅에 떨어져 나뒹굴어도 노란색 리본으로 폴리스 라인을 주위에 널찍하게 둘러서 길을 막았다. 어디로 돌아가라는 Detour 표식도 없어서, 다른 길들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내가 알고있는 로컬 길들은 전부 통제되고 있었고, 하는 수없이 멀리 하이웨이로 우회해서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장마철에 웬만한 물웅덩이쯤은 승용차로 보기좋게(?) 지나다니던 기억을 떠올리며, "미친 놈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가라고 무작정 길을 막는거야? 제 정신이 있는 xx들야!" 집에 도착해서는 와이프에게 푸짐하게 불평과 욕설을 늘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던 것같다. 그러나 미국에서 사는 햇수가 쌓여가면서, 그런 정도의 불편은 당연하게 여겨지도록 미국화(?)가 되어갔다.


2000년대 중반, 중국의 텐진에 출장가서 본 풍경은 놀라움 그 자체이었다. 사람과 자전거와 자동차가 한데 뭉쳐서 돌아가고 있었다. 빵빵거리는 크락숀 소리에 정신이 없었고, 차를 운전하는 운전자도 도로를 횡단하는 보행자도 '안전'이라는 개념은 없어보였다. 거리를 지나다가 자전거와 자동차가 부딪혀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데도, 쪼그리고 쓰러진 부상자를 보살피는 사람 하나 없이, 둘러서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것을 보고, - 심지어는 공안(경찰)까지도 - 마치 외계에 온 듯한 놀라움을 느꼈다.


가끔 한국에 다니러 와서 택시나 버스를 타게되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골목길을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도하고, 보행자가 있는데도 크락숀을 요란하게 울릴 뿐 속도를 줄이려고 하지 않는다. 대로변에 주차되어있는 차량들을 피하는 것도 신기(神技)처럼 보이고, 내가 탄 택시가 급정거할 때는 손발이 다 오그라들고, 질끈 감은 눈을 뜰 수가 없게된다. 기껏 터득한 요령이 절대로 운전기사 옆좌석에 앉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과연 내가 운전할 수 있을까? 염려스럽기까지 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정말 많이 놀랐다. 날이 어두워 컴컴한 저녁에도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는 차량들, 옆골목에서 튀어나오면서 속력을 줄이지않는 차들, 차가 오는데도 땅바닥만 보며 무단횡단하는 보행자들, 빨간 신호등조차 지키지 않는 운전자들, 2차선 도로의 1차선을 차지하고 느릿느릿 가는 운전자들, 심지어는 1차선으로 가다가 우회전을 하는 차량들, 2차선에서 겁나는 스피드로 추월하는 차량들…… 미국에서는 거의 보기힘든 낯선 모습들이었다.

아직도 한참 더 읊을 수 있지만 여기서 줄인다. 왜? 나도 이제는 많이 비슷한 모습으로 운전을 하니까. 어느 교차로에서는 빨간 신호등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고, 대충 아무데서나 U턴을 해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니까. 미국에서처럼 도로칙을 지키려고 노력하지않아도 된다는 것과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손해라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영리하니까. '주정차금지'라는 사인이나견인지역이라는 사인이 달린 전봇대 밑에 주차를 해도 누구하나 스티커를 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왜, 한국인들은 지켜지지도 않는 규칙을 만들어놓고, 쓸데없이 돈을 들여 사인을 만들어 놓았을까? 사인까지 만들어놓고, 왜 단속을 하지않는 걸까? 왜 단속에 걸리는 사람들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대신, 재수없어서 걸렸다는 탓을 하게 할까? 왜, 지켜지지도 않는 곳에 쓸데없이 사인을 만들어놓고, 양식있는(?) 위법자들에게 불필요한 죄책감과 불안감을 갖게할까? 왜, 한국에서는 규칙과 안전이 무시될까? 왜, 이런 모순덩어리의 시스템을 고치려들지 않을까?


우리 한국인들은 자랑거리가 참 많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세계최고의 극빈국으로 원조를 받았던 나라에서, 불과 60여년이 채 안되어 원조하는 국가라고, 세계 10대 무역국이라고, 세계 첨단 IT 국가라고, K-POP과 드라마로 세계 속에 한류라는 유행을 일으키고,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스포츠 강국이라고, 한국의 여성들이 LPGA를 주름잡는다고, 오늘도 유현진과 추신수가 MLB에서 투타에서 활약한다고,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톱뉴스로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되돌아보자! 진정 그렇게 자랑할만한 일들만 있을까? 우리의 부끄러운 진짜 모습들은 그 그림자 속에 감추어져 있지 않을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부정부패, 성장을 앞세워 날로 심화되는 빈부격차, 남재여모(男財女貌)로 대표되는 돈과 용모의 지상주의, 1등만 살아남는 최고주의, 팽배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고,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자연파괴와 인권탄압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름아래 이익을 좇기위해 무시되는 안전과 규칙들이 진정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까? 되돌아보고 반성할 때다.


우리들은 살만큼 살았을뿐만 아니라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보았다. 그렇게 사는 동안 깨달았다.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무언가를 얻기위해서는 희생과 댓가를 치뤄야한다는 것을. 좋은 것만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장의 뒤안에는 군사독재시절의 인권무시와 탄압이 있었고, 재벌이 부를 축적하는 동안에는 숱한 힘없는 국민의 희생이 있었으며, 도시의 화려한 고층빌딩과 도로를 꽉 매운 자동차의 불빛의 그림자에는 불범과 부정, 안전불감증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그 달디단 열매만 즐기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맺기위해서 희생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감싸주어야 할 때다. 


위너(Winner)를 낳기 위해 필연적으로 배출할 수밖에 없는 루저(Loser)들을 돌보아야할 때다. 법을 피하고 규칙을 무시한 승자보다는 도덕과 질서를 지켰던 패자가 존중받는 사회로 거듭나야한다. 성장을 잠시 늦추고, 국민의 안전과 복지와 분배를 위해 숨을 골라야한다. 


안전은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빨리, 빨리'가 통하지않는 시스템이다. 지난 수십 년간 '빨리, 빨리'를 외치며 살아왔던 시스템을 바꿔야한다. 정당한 댓가와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돈과 명예, 온갖 좋은 것만 챙기려는 유병언 같은 소수 기득권자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어찌 단원고 아이들뿐이겠는가?


<후기>

너는 돌때 실을 잡았는데, 

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

쓰던 걸 놓아서 이리 되었을까?


엄마가 다 늙어 낳아서,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

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살았을까?


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

몇 푼 벌어보겠다고 일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받아서 미안해!


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갈게, 딸은 천국에 가!


인터넷에서 떠도는 글로, 희생된 단원고 아이의 엄마가 쓴 글이랍니다.

가슴이 메어져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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