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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여동생과 조카

- 오빠, 첫째 아이는 모범 그 자체야! 걔는 통장도 나한테 맡기고 데빗카드 갖고 다니면서 자기 용돈만 써. 졸업논문은 통과 되었는데, 아직 수업이 안 끝나서 월요일에 수업 받고 저녁에 다시 내려갔다가 금요일 밤에 집에 와. 다음 주에 수업이 완전히 끝난다니까, 그 다음 주부터는 일요일 저녁에 내려갈 거야.

 

- 둘째는 내 자랑이다, 오빠! 카톨릭 의전이 얼마나 들어가기 힘든데. 거기 합격자는 서울대나 카이스트 출신이 대부분이야. 내년 등록금이 벌써 나왔어. 입학금 포함해서 천 만 원이 넘어. 그런데, 걔는 한 번만 내 달래, 다음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데. 장학금 받을 자신 있다고 큰 소리다.

 

법학전문대학원(Law School)과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은 2천 년대에 들어서 법조인과 의료인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생긴 것으로 그 전에 떠난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조카 녀석이 자신이 쓴 '자기 소개서'의 교정을 내게 부탁하면서 카톨릭 의전원이 서울대, 연대 다음 순위로, 얼마나 들어가기 힘든 곳인지 너스레를 떨었을 때만 해도 내게는 그렇고 그런 곳으로 생각했었다. 이미 올드 타이머인 나는 소위 '스카이(SKY)' 아니면 그저 그런 학교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지난 1년 동안 미친 놈 처럼 무섭게 공부만 했다고 동생은 전했다. 빨래 가져올 때나 한 번씩 집에 들릴 뿐, 도서관 가까운 친구집에 머물며, 젊은 놈이 거지처럼 차려입고 공부에만 몰두한 덕에 시험성적은 무척 잘 나왔다고 했다. 그런데 좋은 학교는 시험성적보다 서류와 면접이 중요하다고 걱정을 했다.

 

난, 작은 녀석이 태어나고 얼마 후 이민을 떠나 녀석들이 크는 과정을 보지는 못했다. 다만, 돌아왔을 때는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큰 놈은 한 번도 부모 속을 썩이지 않고, 알아서 공부했고 자신의 실력에 맞는 대학에 진학해서 장학금을 받고 다닌 턱에, 그토록 문제가 많은 한국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걱정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학원에 다녀야겠다고 해서 학원비 준 것이 다라는 것이다. 녀석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1년간 갔다 왔다. 미국에 살았던 나는 아무런 힘이나 도움이 되지 못해,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뉴질랜드에서 사귀었던 친구에게 연락해서 녀석의 체류초기에 약간의 도움을 준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지난 여름방학에 국내 대기업에 인턴으로 취직했고, 결국 졸업하기도 전에 정규직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한국의 뉴스에 오르내리는 20대 취업난과 대학 등록금 문제는 'All A'의 성적을 받은 녀석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태어날 때 가슴에 약간의 기형을 갖고 태어난 덕에 군면제를 받는 행운도 따랐다.

 

연년생인 작은 놈은 내가 귀국해서 동생 집에 있을 때 잠깐 보니, 소위 '끼'가 다분히 있는 녀석이었다. 스스로 알아서 특목고에 갔고 - 지 엄마는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 특목고에서도 쟁쟁한 부모들을 가진 아이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고 어울렸고, 알아서 'SKY'에 해당하는 학교에 진학했다. 3학년 때는 교환학생으로 디씨에 있는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한 학기를 수학했고, 돌아와서는 혼자 - 원래는 친구와 같이 가기로 했으나, 친구가 마지막에 포기하는 바람에 - 인도에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이 놈은 집에만 오면 피아노에 매달렸다. 녀석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었다. 독학했다는 피아노 실력이 보통은 넘어보였다. - 물론 어렸을 때 바이엘과 체르니 교습은 시켰다. 대학의 피아노 동아리에서도 녀석의 실력은 알아주는 모양으로 연주회를 가졌다고도 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피아노로 석사를 받은 사람에게 스스로 찾아가 개인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 강사는 차라리 피아노로 전공을 바꾸라고 했다고 한다.

 

내 기억을 떠올려본다. 단 한 번도 입밖에 낸 적은 없지만, 고등학교 시절 의대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형편을 생각하면 사립대에 진학하겠다는 말을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대에도 떨어진 내가, 서울대 의대에는 실력이 언감생심이었다. 이미 합격해 놓았던 특차로 진학할 수 밖에 없었다.

 

나보다 여덟 살이 어린 막내동생은 가난한 부모님을 생각해서 여상(女商)에 진학했다. 조그만 회사에 경리로 일하면서 월급은 부모님께 드리고 용돈을 받아 쓰며 착실하게 살았다. 공고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청년과 결혼해서도 마찬가지로 착실, 그 자체로 살았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끝까지 돌보았고, 자신의 친정엄마의 치매수발까지 들어야 했다.

 

- 더 이상 아빠하고 말하기 싫어. 앞으로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전화하지 말고, 메일로 해.

 

작은 녀석이 교환학생으로 조지워싱턴 대에 갔을 때, 난 아이들에게 부탁해서 조카 녀석을 돌보게 했다. 넘치는 '끼'와 고집으로 천방지축 까불어서 지 사촌누나와 형을 괴롭힌 모양이었다. 사촌간이지만 낯설기도 한 동생에게 화가 난 아이들을 달래느라고, 한 내 말 - 그 녀석은 내가 너희들에게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욕심과 '끼'가 있는 놈이다 - 에 딸이 잔뜩 화가 났었다.

 

그래, 이제는 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내 조카들은 지 부모들의 성실함을 보고 배웠다는 것을. 나는 자식들에게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자주 보였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을. 너희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 더 컷다는 것을.

 

공부 못한다고 내게 많이 혼나며 자란 내 동생, 지금은 나보다 더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운 내 동생아, 너는 참 아이들 잘 키웠다. 조카놈이 좋은 학교에 간다는데 조금도 보태주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구나! 사랑한다, 내 동생아!

 

<후기>

아이들 교육을 핑계로 이민을 간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겠다고 기러기 가족으로 이산 아닌 이산가족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동생과 조카들을 보며 저는 정말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으로 가정을 화목하게 꾸리고 성실하게 사는 모범을 보인다면 아이들은 저절로 잘 된다고 믿습니다.

 

2년 전, 이민을 떠난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아들녀석과 이야기 했었습니다.

 

○ 너는 어렸을 때 참 괜찮은 아이였어. 아마 우리가 이민을 가지 않았다면 넌 틀림없이 여기서도 공부 잘해서 서울대 같은 좋은 대학에 갔을 거야.

 

- 아마 그랬겠죠.

 

국민학교에 다니던 어린 녀석을 뉴질랜드로 미국으로 끌고 다녔고, 좋은 부모로서 화목한 가정을 만들지도 못했고 모범을 보여주지도 못한 탓이다. 세상에 문제있는 아이란 없으니까, 오직 문제있는 부모와 어른만 있을 뿐이니까.

 

아이들아,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란다. 그래서 너희들 인생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란다.

 

▽ 조카 녀석이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카톨릭 의전원 합격을 알리는 웹페이지사진: 가톨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최종합격했습니다
앞으로 좋은 의학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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