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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빈수레가 요란하다

(2013년 5월 20일에 작성한 글)

 

어렸을 때 씁쓸한 기억이 있다. 당시 서울의 변두리였던 수색을 지나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화전리'라는 곳에 살았던 중학생 시절, 경의선을 이용해 기차통학을 했었다. 시험 때라 일찍 끝나 서울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청년 - 어렸을 때니까 아저씨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오더니 모 회사에서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어리숙해 보이는 중학생에게 호들갑을 떨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장학금 받을 욕심에 그 사람을 놓칠새라 죽어라 하고 쫓아가, 미도파 근처의 큰 빌딩 앞에서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고 있는 나에게, 시계를 차고 있으면 가난한 학생으로 보이지 않으니 시계를 풀어놓고 들어가라고 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받은 시계를 빼앗으려는 한심한 사기꾼에게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그 후에도 KAL 빌딩 근처를 지나려면 그 때 일이 생각나 혼자 쓴웃음을 짓곤 한다. 60년대 아주 가난했던 시절이니 그런 어수룩한 사기에도 걸리는 아이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50여 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경제만 발전한 것이 아니고 사기수법도 크게 진화해서 선량한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한다.

 

ㅅ선배는 졸업은 같이 했지만, 대학 졸업 후 만나지 못하다가 초보 이민생활에서 우연히 만나 친해진 분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어느날 예기치 않게 ㅅ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누구에게 내 소식을 들었다면 반갑게 나눴고, 다음에 서울에 갔을 때 만났다.

 

- 아직은 건강하고 일 할 수 있는데 놀며 빈둥댈 수는 없잖아. 뭘 하든 해야지. 그렇다고 낼 모레가 환갑인데 뭉텅 돈을 들여 뭘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아무 소일거리나 하려고 했었지. 그래서 동기 녀석들이 하는 회사에도 나가고, 친구가 하는 부동산 사무실에도 나가고 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갑갑하더라고.

 

- 그런데 어떻게 해서 친환경 표고버섯 양식을 알게 되었는데 괜찮을 거 같아. 돈도 별로 들지 않고, 지금 교육을 받고 있는데 혼자 할 수도 있을 만큼 쉬운 일이야. 친환경이라 재배해서 수확만 해놓으면 Kg당 3만원씩 수거를 해간다는 거야. 이제 교육은 거의 끝나가고 현장 견학도 다니면서 직접 일을 배우고 있거든.

 

ㅅ선배의 이야기로는 큰 돈벌이는 안 되어도 혼자 소일거리로 용돈 정도는 벌 수 있다고 했다. 교육도 시켜주고 일단 시작하면 자립할 때까지 현장 지도도 해준다는 것이다. 2~3천 정도만 들이고 혼자 고생만 하면 월 2백 못 해도 백 오십은 손에 쥘 수 있다는 거다. '그래, 선배가 해보고 괜찮으면 나도 소개시켜 주쇼' 하고 헤어졌다.

 

작년, 딸 아이가 왔을 때 서울에 갔다가 그 선배를 다시 만났다. 표고버섯 때문에 나갈 수가 없으니 안산으로 오라고 했다. 시커먼 천으로 덮힌 꽤 커다란 비닐하우스를 찾아 들어가니 선배가 켜켜이 선반에 올려진 메주 모양의 누런 덩어리에 물을 주고 있었다. 선배의 이야기는 1년 전과 크게 달랐다.

 

- 막상 해보니까 장난 아니야, 이거. 사람 잡는 일이구만. 하루 종일 여기에 붙어 있어야 해. 한 시도 벗어날 수 없다니까. 내가 이깟 일 하려고 온 것도 아닌데 말야.

 

이렇게 시작한 선배의 이야기는 이렇다. 톱밥으로 만든 메주 모양에 버섯 종균을 심은 것을 사서 선반에 올려놓고 건조해지지 않게 자주 물주고, 온도 맞춰주고 자주 뒤집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라는 거다. 마침 이 비닐 하우스도 쓰라고 해서 쉽게 생각했다는 거다. 그러나 천 개가 넘는 종균톱밥 덩어리를 관리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 고생 실컷 하고 돈만 한 이천 날린 것 같아. 이거 한다고 했을 때, 반대했던 마누라 대하기만 민망하게 되었어. 그렇다고 들어간 돈이 억울해서 계속 매달려 보았자, 이것들 파는 놈들만 재미 보는 거야.

 

우선 이에 관한 기사(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159501)를 보자. 정말 그럴 듯하다. 그러나 돈 버는 사람은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 필요한 톱밥이나 기자재를 파는 사람들이다. 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럴 듯한 이야기에 넘어간 사람들은 고생만 하고, 생각 하나 잘못으로 수 천만 원은 쉽게 날린다.

 

▼ 표고버섯 종균을 심어놓은 톱밥 덩어리. 한 개에 2만 원 정도 한다. (기억이 가물가물, 정확한 것은 아니나 그 비슷함) 이 정도 시설을 하려면 몇 천만 원은 쉽게 들어간다.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서 여러 층의 선반을 만드는데, 허리 굽혀 물을 주거나 뒤집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숫자가 많다보니 허리가 휘는 일이다.

 

귀농이든 귀촌이 되었든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은, 소일거리를 우선 생각한다. 소액을 투자하여 소일거리나 하면서 욕심부리지 않고 용돈이나 벌었으면 하는 마음을 내심 갖고 있고, 본인은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기꾼들은 바로 그런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은퇴준비가 잘 된 분들은 아예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니 문제가 없지만, 본의 아니게 은퇴를 해서 앞날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의예로 쉽게 넘어갈 수도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일확천금을 노리고 서부로 서부로 이주했던 시대에, 사금으로 돈을 번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고,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를 팔거나 그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장사치들만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특히 전쟁 때 텐트를 공급했던 업자들이 텐트 대신 청바지를 만들어 크게 이익을 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난 5월 14일에 방영된 MBC PD수첩 '귀농·귀촌, 악몽이 된 인생 2막'을 보고, 노파심이 생겼다. 한국에서만 살아온 사람들도 저렇게 당하는데, 수 십 년간 외국에서 산 이민자들이 '인생 2막'을 설계하며 귀국을 선택했는데, 이런 사기꾼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PD수첩을 보면서 ㅅ선배가 생각났다. 물론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가 뉴저지에서 LA까지 가서 비슷한 일을 겪고 더 큰 돈을 잃었지만, 자신이 평생 전공한 분야가 아니라면 어떤 감언이설에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기를 치려고 달려드는 사람은 절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No' 대신 'Yes'만을 말한다. 목사라고 하고, 평생 남을 위해 봉사했다고 하고, 세계 최초 또는 국내 최초를 말하고,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고, 싸다고 하고, 적은 돈으로도 가능하다고 하고, 수익이 높다고 하고, 끝까지 책임지고 도와주겠다고 한다. 도무지 안 될 이유가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면 무조건 100% 허황된 거짓이다.

 

<후기>

내게 어떤 행운이 올 거라고 절대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마음으로 온 고국에서 낭패를 만나는 일은 정말 없어야겠습니다.

이런 류의 글은 이미 여러 차례 올렸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분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것, 깡통이 더 시끄럽다는 것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용물이 빈약할수록 포장은 더 화려하고 그럴 듯합니다. 혹시라도 변변찮은 이 글이 단 한 분의 피해자라도 예방할 수 있다면 글쓴이로써 큰 보람이겠습니다. ㅎㅎㅎ

 

 ▼ 아래는 PD수첩 방송을 캡처한 것입니다. '저는 막노동하는 목수요, 행복을 실천하는 목사입니다.'라고 적힌 팜플렛이 백미입니다. 목사라고 하면 최소 사기는 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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