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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사라진 것들에 대한 단상

(2013년 4월 17일에 쓴 글)

 

많은 것이 변했다. '정말 많이 변했다'는 표현은 차라리 진부하다. 사라진 것도 많고, 어떤 것은 이제는 볼 수 없어 그립기도 하다.

 

지난 20년간 사라진 것들을 살펴보자. 갤럽에서 설문조사 결과 연탄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외에 삐삐(비퍼), 공중전화, 버스 안내양, 시내버스 회수권, 사람 간의 정, 가요 테이프, 엿장수, 뽑기/달고나, 편지, 깨끗한 자연, 초가집, 제비, 불량식품, 우체통, 어린아이들의 순수, 석유곤로, 고무신, 아이스케끼, 함박눈, 넉넉한 인심 등으로 대답이 나왔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최루탄이 첫째로 나왔고, 그 뒤로 소년잡지, 버스 안내양, 시멘트 쓰레기통, 포니택시, 반공교육, 가족계획 프로그램, 창경원, 솔 담배와 함께 비둘기호 완행열차와 비닐우산, 프로권투 중계도 나왔다. 이렇게 굳이 열거하는 이유는, '아참,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런 게 있었지!'하고 미소 짓는 분들을 위해서다.

 

40대 이상이라면 연탄에 대한 추억, 한 두 가지쯤은 다 가지고 있을 거다. 가을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월동준비로 연탄 들일 걱정을 하던 부모님에 대한 추억이 아련하다. 오백 장이나 천 장을 연탄광에 켜켜이 쌓아두고 안도의 한숨을 쉬던 엄마의 모습이 '연탄'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른다.

 

옛날 공중전화를 얼마나 자주 이용했었던가!

공중전화 앞에 늘어선 줄 끝에서 급한 전화를 하기 위해 앞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경험이 한 두번쯤은 있을 것이다. 집에 전화가 없었던 나는 대학합격 소식도 옆집 전화로 전해 들었었다.

 

70년대 유신독재와 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의 최루탄 가스도 잊을 수 없다. 청계천이나 종로에 자욱했던 매케한 가스를 피해 이리 저리 도망치던 기억도 이제는 아스라한 추억일 뿐이다. 시내버스 회수권, 군대에서 주고받았던 편지, 완행열차 출입구를 차지하고 기타치고 노래를 부르며 강촌에 갔던 일, 슬레트 지붕으로 바뀌기 전의 초가집, 골목어귀 신작로에 있던 빨간색의 우체통, '오라이'와 '스톱'을 번갈아 외치던 버스 안내양들, 달고 시원한 아이스케끼도 있었고,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이기고 세계챔피온이 되어 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온 국민이 열광했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있었다.

 

노란색 고무신을 신고 다니다가 못을 밟아 발바닥에서 피가 나면 아버지가 망치로 두드려주곤 했다. (왜, 그랬지? 나오던 피가 멈추나?) 한강에서 헤엄도 쳤었고, 서울에서도 미꾸라지 잡으러 다녔다. 어디든 산에 가서 흐르는 시냇물을 만나면 두 손으로 떠 마셔도 될 정도로 깨끗한 자연이 오래 전이긴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글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좋은 것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이치다. '사람 간의 정'도 사라졌고, '아이들의 순수함'이나 '넉넉한 인심'들도 사람들은 없어졌다고 응답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주노아톰'님이 제주에서 19살의 나이로 한 달 동안 무전취식 비슷하게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제주가 그토록 아름다운 섬이라고 느꼈던 것도 40년 전 '넉넉한 인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지 않았을까? 방과 후에도 학원을 두어 개씩 돌아야하는 아이들에게 '순수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한국의 변방 제주에서도 말이다.

 

들에 산에 널려있는 달래나 고사리도 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사리가 많은 곳을 알고 있으니 같이 가자기는커녕 그 지역을 남이 알까 쉬쉬하는데, 무슨 놈의 '사람 간의 정'이 있겠는가! 강원도 양양의 순박했던 시골 사람들이 가을 송이철만 되면 인심이 극도로 사나워진다고 한다. 그 비싼 송이를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이웃들을 견제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들은 바 있다. 코흘리개 때부터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이, 돈 되는 것을 남과 나누기 싫은 욕심이 소중한 가치들을 앗아가고 있다. 비록 물질적인 풍요는 얻었지만 말이다.

 

명절 전날에는 석유곤로를 마루에 켜놓고 밤새 전이나 지짐을 부치기도 했다. 맞아, 반공교육! 그런 것도 있었다, 이틀씩이나! 해외에 나가는 사람은 여권을 신청하려면 반공교육을 받은 수료증이 있어야 했다. 하하하, 그때 졸기만 했던 탓에 나는 통일이 최우선 가치라고 믿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장충동 어딘가 안기부 산하 교육기관에서 했던 안보교육을 너무 열심히 받은 분들은 통일을 외치는 사람들을 종북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세상이 이토록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그렇게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걸 보면.


가족계획 프로그램!!! 아이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어드는 요즘, 얼마나 격세지감을 생각케하는 단어인가! 학교든, 관공서든, 회사건물이든, 길거리든 어디든 포스터나 표어가 붙어있었다.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나서 잘 기르자' 라든가, '둘도 많다! 하나만 나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자'라든가 하는 표어나 포스타. 

 

예비군 훈련장에서는 구청에서 나온 공무원 열변을 들어야 했고, 정관수술을 하면 다음날 훈련을 면제해 주어 집에서 쉴 수 있었다. 나도 이때 정관수술을 했는데, 이미 그 전에 아들녀석이 제 엄마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 녀석 조금만 늦었으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다. 첫 아이가 쌍둥이인 탓에 세번째 아이는 의료보험혜택을 볼 수 없었고, 나는 졸지에 세 아이의 애비가 되어 야만인 혹은 미개인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운(?)도 없지, 걔들이 거꾸로 나왔으면 세 아이라도 의료보험혜택을 받았을 텐데… 하하하, 웃자는 이야기다. 내가 아는 친구도 예비군 훈련에서 정관수술을 받고나서,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갔는데, 아들 하나로는 나중에 너무 외로울 것 같아 그것 푸는데 돈 좀 썼다. 결국 딸을 얻었고. 

 

프로권투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가! 세계 타이틀 매치를 한다고 하면 모두들 흑백 TV의 조그만 화면 앞으로 모여 입에서 침이 튀도록 응원을 했었다. 우리나라 선수가 아니더라도,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등 해외 유명 선수들도 꿰고 있었다. 홍수환 선수가 파나마의 카라스키야를 4차례나 다운 당하고도 KO승을 했을 때는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과 희열을 경험했었다. 

 

이렇듯 사라진 것 하나하나에는 숱한 이야기들과 추억이 들어있다.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보다 풍요로운 물질 속에서 살기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동안, 많은 것을 얻고 이루어냈지만, 또한 많은 것을 잃고 놓쳤다. 그리고 그 사라진 것들 중에는 허잡스러운 것도 있지만, 정말 지키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들도 있었다. 그걸 지켜내지 못한 후유증은 적지 않다. 

 

자살과 이혼, 우울증, 가족해체, 세대간 갈등, 양극화, 계층간 대립, 만혼, 일인가구의 급증, 아르바이트 세대, 비정규직, 출산율 저하, 하우스 푸어, 정리해고, 불안한 노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후기>

혹자는 주장합니다, 가난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그렇지 않다고 논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물질적인 풍요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만큼 가치가 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제주에서 사라진 '통시'에 대해 생각하다가, 우리에게 사라진 것들에 대해 찾아보았고, 사라진 것들 중에는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아픔은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짧은 생각(斷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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