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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아웃사이더(局外者)의 시선

(2013년 4월 28일에 작성한 글)

 

인생은 착각이런가? 돌이켜보면 그것이 착각이었든, 착시현상이었든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소아(小我)가 어떻고 대아가 어떻고 하는 철학적 개념은 무지해서 알지 못하지만, 누구나 자기중심적 사고로 살아간다는 것은 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학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고, 군입대하고 나니 세상에는 온통 군인만 있었다. 샐러리맨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동안, 내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인생을 이해했다.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었다.

 

어느날 아침에 깨어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것 처럼, 어느날 문득 정신이 드니 나는 더 이상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젊은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중심에서 벗어나 국외자(Outsider)가 되어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국외자였지만 그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바둑 두는 것을 옆에서 들여다 볼 때가 있다. 인지상정인지 자연스럽게 약자 편에서 판세를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훈수를 하고 싶어진다. 세상을 모르고 살았지만, 세상을 다 아는 것 처럼 떠들던 시절(?) 죽자사자 같이 어울리던 친구 둘이 있었다. 4,5급 정도의 실력인 두 친구는 내게는 4점이나 5점을 깔고 두었지만, 그 둘은 그야말로 호적수였다. 두 친구의 바둑을 보노라면 훈수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진다. 지금은 교수가 된 친구가 덴버에 사는 친구보다 좀 약했다. 승리를 눈앞에 둔 덴버가 미리 내게 약을 친다. '너, 이새끼! 훈수하지 마!' 그러거나 말거나, 약자인 교수 놈에게 결정적 한방을 훈수하고 도망치면, '야, 이 개xx!' 하고 덴버가 주먹을 쥐고 쫓아오곤 했다.

 

60년 가까이 살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들이 있다.

스스로는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참 어리석게 살았다는 것, 속으로는 겸손하다고 믿었지만 교만과 오만 속에서 살았다는 것, 남의 말을 듣기 보다는 남에게 말하기를 더 좋아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설득하려드는 우(愚)를 저질렀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집사람과 아이들도 포함된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소통은 교장선생이 월요일 아침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교단에 올라가 하는 조회다. 일방적으로 자기가 할 말만 하고 내려가는 원웨이 소통이기 때문이다. 그게 최악의 커뮤니케이션인 것은 알았지만, 나 자신도 그 비슷하게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놀랐다.

 

깨닫게 해준 녀석은 뉴저지에서 만난 내 보스로 부사장이었다. 나보다 대엿살 어린 그 녀석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아랫사람에게 설득하는 것에 집착했다. 말이 좋아 설득이지 폭력에 가까운 강요였다. 퇴근무렵에 시작한 그와의 논쟁이 새벽 가까운 시간에 끝난 적이 있었는데, 그에게 설득 당했다기 보다는 그 아집과 독선에 그냥 졌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거다. 그 때 그런 어리석은 짓을 나는 하지 않았는가 성찰하게 되었다.

 

또한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좋은 것만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새롭게 깨닫는다. 가득 찬 그릇에는 더 담을 수가 없다. 아무리 더 좋은 보물이 곁에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가난하고 없이 살았어도 별 불만도 없었고, 단칸 방에서 살았어도 저녁이면 온 식구가 웃고 즐겁게 살았던 과거의 기억이 있다. 30년 전 직장에서 보내준 해외연수 덕에, 풍요로운 미국을 처음 보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참 초라해 보였다. 이민을 꿈꾸게 된 계기요,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햇볕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 물질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정신은 더 피폐해지고, 쾌락을 추구할수록 공허와 허전함은 더 크다. 쾌락은 중독성이 있어서 더 큰 쾌락을 쫓게 되고, 결국 파멸로 인도한다. 경쟁사회에서 승자의 영광이 크면 클수록, 패자는 더한 절망감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첨단기기의 혜택으로 더 없이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한편에서는 우울증으로 시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은 욕심이 근원이다. 더 큰 쾌락을 좇는 것도 욕심이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탓에 우울증도 생긴다. '더(more)'라는 것은 상대적인 말이다. '더'라는 것의 근원은 욕심이요, 남과의 비교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욕심만 버린다면 '더'는 없어지고 만족하는 것을 알게 된다. 불만도 없고 우울도 없다.

 

그러나 그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세상이 온통 욕심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 더 예뻐질 수 있다고, 돈으로 더 멋있어질 수 있다고, 예쁘기만 하면 돈 많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돈만 많으면 아름다운 여자를 가질 수 있다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다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더 크고 더 좋은 집, 더 비싼 차, 더 예쁜 여자가 바로 행복이고 삶의 기쁨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출세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하기 싫은 공부도 억지로 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인간이고 낙오자라고,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낫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암시하고 세뇌한다.

 

그런데 세상이 이렇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왜?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낙오하지 않았고, 그럭저럭 다른 이들과 비슷한 삶 속에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없고 깨닫지 못했다. 이제 그 곳에서 조금 벗어나 밖에 있어보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세상인지 조금은 보인다. 다른 나라에서 살다 와보니 짧은 시간에 급격한 변화를 이룬 한국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긍정적인 면과 밝은 면이 강한 만큼, 부정적인 면과 짙은 음영도 같이 있다. OECD 최고의 자살율과 이혼율, 최저수준의 복지와 사회보장 시스템이 그것이다.

 

국가가 패배자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극심한 경쟁사회를 만들어 놓고 모른 채하고 있다. 경쟁사회를 통해 부(富)라는 과실을 얻었지만, 그 열매가 주는 달콤함만 즐기려 할 뿐, 그 시스템에서 발생한 희생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국가가 할 일을 망각하는 것이요, 국민이 국가에 위임한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견해에는 반대의 이유를 찾기에 급급하고 유사한 의견에는 이론의 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동참부터 하고 본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힌 복잡한 사회에 살면서, 찬성하고 반대하는 것에는 너무 단순하다. 이론도 없고 배경도 없이 그저 자그마한 경제적 이해타산이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된다. 그것이 흑백논리를 만들어 서로 네 탓이라고 상대방에게 손가락질만 해대게 만든다. 민주주의나 통일 같은 대의명분을 외치는 대통령 보다는, 내 동네 내 집 값을 보전하고 올려주는 정치인이 최고가 되는 세상이다. 작은 이로움(小利)에 집착하여 큰 이로움(大利)을 잃고 있다.

 

복기할 때는 쉽게 보이는 간단한 수가 바둑을 둘 때는 왜 그렇게 안 보였을까? 이해관계를 떠나 아웃사이더로 살아보니 세상사가 쉽고 분명하게 보인다.

 

▼ 어제 걸었던 갑마장(甲馬場)길로 이곳은 '큰사슴이 오름'이라는 곳입니다. 제주에 살기 위해 육지의 도시에서 온 젊은 사람들 틈에서 주노아톰님, 동서형님내외와 같이 걸었습니다. 

 

▼ 정상 부근에는 철쭉이 소박한 매무새로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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