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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친구 부친상과 같이 한 상념

(2011년 5월 1일)

 

친구부친의 부음소식을 들은 것은, 늦은 아침무렵 동서네 밭에 심을 모종을 사러 가는 길이었다.

하루에 한 두번 전화가 올까말까한 핸드폰을 받았더니, 서울에서 칫과를 하고 있는 친구다.

 

- 멍청이(이름의 발음이 비슷해서 이렇게 부른다) 아버님이 오늘 새벽 돌아가셨다. 나는 오늘 갈 건데 네가 온다면 기다렸다가 같이 가고...

 

 (연세가 어떻게 되셨었지?)

 

- 27년 생이시니까, 85세 되셨지...

 

처음에는 비행기 값이나 보태 부조나 하려고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지방에서 올라왔던 친구다. 또 나는 그 친구 어머님 부음에는 소식도 전해받지 못해 참석은 커녕 부조도 못했다.

 

거기다가 녀석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작년 초, 사고로 잃는 참척(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의 고통을 당했는데 그것도 작년말 귀국해서야 알게 되었었다. 돌아와서도 전화만 했지, 만날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3년 전 당한 모친상 때 그 친구가 문상을 왔을 때가 마지막 만난 것이다.

 

부지런히 준비를 하니 1시 반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비행시간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가는 두어 시간동안 지난 세월들이 생각나 상념에 젖는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가깝게 만나던 친구 중 가장 부유했던 친구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과는 다르게 당시로서는 그 친구의 부모님은 인텔리였다. 일단 대학을 나오셨고 은행 지점장을 지내고 계셨다. 1970년대 초 녀석은 금호동 이층집에 살며 자기 방이 있었고, 학교 선생들로부터 과외도 받으며 공부했다. 귀공자 타입의 그 친구는 기타뿐만 아니라 피아도도 잘 치고 언변이 좋아 나를 비롯한 친구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그 집안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군사정권의 강압에 의해 친구 아버님이 은행에서 강제해고 되신 것이다. - 나중에 이 부분은 보상을 받지만, 그냥 계셨으면 은행장까지 하셨을 수도 있었을 테니 명예만 회복된 셈이다.

 

또 다른 친구가 생각난다. 대학친구로 대학 때부터 연애하던 여자와 결혼해서 그 와이프도 잘 알고 지냈던 친구다.

와이프는 지금의 초등학교 양호선생을 했고 내 친구는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일했는데, 군사정권의 폭정은 초등학교 양호선생에게까지도 미쳤다.

 

'X팔, 어떻게 양호선생을 다 짜르냐?' 며 툴툴거리던 그 친구는 몇 년이 지난 후 8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났다.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있는 그 친구에게 하필이면 미국이 아니고 아르헨티나냐고 내가 묻자 떠나면서 했던 마지막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난다.

 

- 세상 어딜 가도, 이 썩어빠진 대한민국보다는 낫다.

 

토론토 근처에서 부동산 에이전트와 토바코 샵(구멍가게)을 하며 지내는 그 친구가 지난날 했던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래본다.

 

2000년 이었던가? 하여튼 그 기사를 읽은 것은 2천년대 초쯤의 일로 기억된다.

 

유치원 아이들이 인천의 어느 곳에 놀러가서 자다가 불이 나서 10여명의 아이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났다. 그 아이들 중의 한 엄마가 핸드볼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딴 공로로 받았던 국민훈장을 정부에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는 기사가 친구의 참척과 겹쳐진다.

 

친구의 아들은 요즘 세상에 지방대학을 나왔으니 취직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28살이나 된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나서서 어떤 회사에 수습사원으로 취직을 시켰다고 들었다. 3개월의 수습이 끝나는 마지막날 저녁, 퇴근을 위해 주변을 정리하던 중, 쌓아놓은 드럼통이 굴러 떨어져 머리를 맞고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아,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하던가!

인간들이 길흉화복에 따라 울고 웃지만 결국 부처님 손바닥 위일 뿐이다.

아직도 작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몸과 마음이 그리고 쉽게 바뀌는 기분이 더없이 어리석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는 여전히 동안으로 귀공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극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흔적이 보이는 듯했다.

 

○ 편안히 눈은 감으셨니?

 

- 응, 그래. 마지막 순간에 정신이 드셔서 다 알아보시고 그리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어떻게 모실거니?

 

- 화장할거야. 엄마하고 새끼도 화장해서 수목장을 했으니까 같은 곳에 모셔야지. 너도 알다시피 선산이 이북에 있잖니.

 

그래, 애써라. 나중에 정리가 어느 정도되면 와이프하고 제주에 한 번 와라.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집안도 황해도 출신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청평계곡으로 놀러가서 텐트치고 놀던 일, 대학시험보고 그 친구 집에 몰려가서 술 먹고 밤 세웠던 일, 그 친구 결혼 전날 함졌던 일, 아들녀석 돌 잔치, 돌아가신 아버님 회갑연 같은 40여년 세월이 활동사진이 되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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