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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녀 이야기 (2)

(2013년 1월 27일)

 

결혼하게 되면 미국으로 돌아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약간은 들떠 있다가 실망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친구 어머님이 한 이야기의 부담감에서 해방되었다는 안도감도 동시에 느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갔다. 때마침 당시 우리는 20대 후반으로 결혼적령기에 있었다. 또래 친구들 결혼식이 붐을 이루었고, 그들처럼 나도 곧 그 물결에 휩쓸렸고 결혼했다. 친구가 한국에 나오거나, 내가 미국출장길에 친구에게 들리게 되면, '동생은 잘 살고 있냐?'고 지나는 길에 형식적으로 안부를 물어는 보았지만, 곧장 잊어버리는 게 다였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천 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민초기의 어려움에서 겨우 벗어날 때 쯤, 덴버의 친구로부터 부부동반해서 라스베이거스에 놀러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1박에 천 오백 불이나 하는 벨라지오 호텔 꼭데기층 스윗룸을, VIP 고객인 친구 덕분에 하루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준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세를 탔던 벨라지오 호텔도 궁금했지만, 어떻게 생긴 방이 그렇게 비싼지 호기심이 일었다. 또 나는 라스베이거스를 여러번 갔었지만, 와이프는 처음이기도 했다. 친구의 제안은 LA 플러튼에 있는 여동생 집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에 렌트카로 떠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LA 공항에는 미리 도착한 친구가 나와 있었다.

 

친구와 함께 여동생의 집에 도착하니 근사하게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그녀의 남편은 필리핀 이민자로 변호사이었는데,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영화배우 처럼 아주 잘생긴 친구이었다. 필리피노들도 저렇게 생긴 친구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만큼, 요즘 말로 '차도남(차가운 도시남자)'이었다. 여동생은 두 딸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전후사정을 잘 아는 와이프는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저렇게 예쁜 여자를 놓쳐서 억울하겠어!' 하며 짓궂게 굴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녀는 친구의 여동생일 뿐이었다. 철없던 고등학생 시절에는 가족보다 더 가까웠던 친구였고, 그 친구의 중학생 동생으로 귓가 부근에서 단발머리를 했던 어리고 촌티나는 모습이 쉽게 지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와이프가 같은 나이일지라도 내 여동생과 다름이 없었다. 다만, 옛날 내게 라면을 맛있게 끓여주던 그 여동생이 자신은 간호사로 남편은 변호사로 풍족하게 사는 모습이 그냥 보기에 좋았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여동생과 나는 가끔 이메일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전화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주로 내용은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LA 다운타운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어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는 것에 대한 내 조언을 구했다. 여동생은 병원을 관두고 남편의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같이 일한다는 말도 그때 들었다.

 

뉴저지에서 잡을 잃은 후, 우여곡절 끝에 2009년 7월 1일 나는 LA로 이주했고 살게 된 곳도 플러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부에나팍이었다. 덴버의 친구도 때마침, 동생과 어머님이 살고 있는 LA로 휴가를 와서 우리는 같이 헌팅턴 비치에 산책을 가기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오빠, 나 힘들게 살았어. 누구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이해 못한다. 어떤 때는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서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정말 간절하게 기도할 때도 있어.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지, 아침에 일어나면 전부 내가 할 일 투성이지, 왜 이렇게 사는 게 쉽지 않지?

 

그녀는 남편 사무실 일을 그만 두고, 다시 병원에 나가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일할 때, 거구의 응급환자를 다루다 허리를 다쳐 디스크로 수 년째 고생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 걔(남편을 이렇게 불렀다)가 인물이 좀 있잖아! 거기다 변호사 아냐? 여자들이 좀 많은 줄 알아? 보통 바람둥이가 아냐? 내가 신앙이 없었으면 진짜 열 번도 더 이혼을 했을 거야. 그냥 신앙으로 버티고 사는 거야. 나는 걔 완전 포기했어. 나한테 걸린 것만도 몇 번인지 몰라. 이제는 나한테 걸리지만 말고 바람 피라고 한다. 그게 속 편하거든. 이혼하자고 하면 싹싹 빌어.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거지.

 

- 돈이나 잘 벌어주면 몰라. 뭘 믿고 그랬는지 로펌을 크게 차리는 바람에 다 까먹었어. 빚까지 졌는데 뭘. 집 하나 겨우 가지고 있는 게 다야. 변호사라구 남들은 돈 잘 버는 줄 알지. 많이 벌기도 해. 그런데 그렇게 벌면 뭐해, 나가는 게 더 많은데. ㅎㅎㅎ, 빛 좋은 개살구야. 남 보기에 빛깔만 좋을 뿐이야.

 

- 오빠, 시댁은 어떤 줄 알어? 필리핀에서 친척들이라도 오면 몇 날 며칠을 우리집에서 머문다. 어떤 때는 아이드까지 열 명도 넘게 묵을 때도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을 안 해. 걔네들 풍습이 그런가 봐. 그냥 차려주면 먹고 소파에서 뒹글뒹글하면서 TV나 보고 있는 거야. 숟가락 딱 놓으면 그걸로 댓츠 잍, 양심이 없는 건지 생각들이 없는 건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몰라.

 

- 시집살이도 보통 시집살이가 아냐. 아마 한국에서도 요즘 그런 시집살이가 없을걸. 병원 일이 쉽기나 해. 요즘은 응급실 담당도 아니고 쉬운 일을 하지만, 예전에는 많이 힘들었거든. 열 명이 넘는 손님 뒤치닥거리 하고나서 야간에 병원 응급실로 출근한다고 생각해 봐.

 

LA에서 손가락을 다쳤을 때, 그녀가 도움을 주었다. (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 LA 에서의 1년 - 두 번째, 2011. 3. 2 참조) 치료비 청구서를 병원과 협상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고, 소독을 해주고 붕대를 갈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LA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나를 많이 안타까워 하기도 했었다.

 

<후기>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칩니다.

이글을 첫사랑 이야기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이민 이야기일 뿐입니다. 7~80년대 수많은 분들이 Better Life를 찾아 혹은 American Dream을 찾아 미국으로 미국으로 탈한국을 감행했었습니다. 제 친구도 그 여동생도 그런 대열 속에 있었겠지요. 그런 사람들의 한조각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 경우는 약간 다릅니다. 물론 저도 Better Life를 꿈꾸며 탈한국을 했었습니다만, 저 보다는 자식들이 부정부패가 가득한 나라에서 살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조금 더 강했습니다. 저 자신 또한 그 부정부패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싫기도 했지만.

 

제게는 마음이 짠해지는 스토리이나,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다음 편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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