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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녀 이야기 (1)

(2013년 1월 26일에 작성한 글)

 

Hi, of course, it is for FUN. I am going there with my best friend from San Jose. We will be touring with tour group.
I really hope I can see you and your wife.

How is your life there? I am very curious.

BTW, husband and I filed for divorce and the divorce will be finalized by beginning of next year. I sold the house and renting a house now near my mom's condo.

Life changed so much since we are no longer married. I wasn't doing well at first but doing so much better now.

Please take care.

 

작년 9월 그녀로부터 한국에 오는 길에 제주에 들리겠다는 이메일이 와서, 무슨 일로 오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으로 온 메일이었다.

 

정말 많이 놀랐다. '이혼이라니!'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절친의 동생이었다. 1970년대 초, 그 친구의 집은 연희동 높은 언덕빼기 꼭데기에 지어진 5층 짜리 시영아파트 5층이었고, 자주 어울리던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그 언덕과 5층까지 올라가노라면 숨이 턱에 차곤 했다. 친구 녀석은 당시 중학생이었던 자기 동생에게 큰소리로 말하곤 했다.

 

- 순희야! 친구 왔다. 라면 좀 끓여라. 배 고프다.

 

더운 여름날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빤스만 입고 그 좁은 화장실에서 우리는 서로 등목을 하며 땀을 식히기도 했다. 중학생이었던 꼬맹이 여동생은 의식하지도 않았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그 여동생이 우여곡절 끝에 먼저 미국에 가있는 엄마를 따라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때마침 군대에 가있어 나오지 못하는 친구를 대신해서 김포공항에 나갔었다. 가서 열심히 살라는 등의 상투적인 인사말이 오가고 마침내 출국장으로 그녀가 들어가려는 순간, 그녀가 내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고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친척과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어 더욱 당황스러웠다.

 

- 야, 듀크야! 너 순희 어떠니? 너 순희랑 결혼해라.

 

몇 년 후, 미국에서 친구 어머님이 나오셔서 친구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어머님은 다짜고짜로 이야기했다. 나도 당황했지만, 친구도 당황했는지 자기 엄마에게 그런 말을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나는 나대로 생각지도 않은 질문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밖에 없었지만, 아직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내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다.

 

군대생활 말년은 최전방 OP(Observation Post)로 파견나가 있었다. 포병 행정병이었던 나는 병장을 달고 조수에게 업무를 인계해주고 나서는, 철책을 담당하는 보병의 벙커에 앉아 북한의 동향을 포대경이라 불리는 망원경으로 감시하는 것이 주임무이었으나 졸병을 데리고 있기 때문에 할 일이 별로 없는 최고의 보직이었다.

 

- 야, 장병장! 너 미국에서 아가씨가 면회 왔는데 어떡하냐? 너, 나올 수 없는 상황이잖아.

 

어느날 본부 포대 위병소에 근무하는 김하사로 부터 전화가 왔다. 김하사가 넘겨주는 전화 너머에서 친구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응, 나다. 순희가 미국에서 나왔다가 너 보고 간다고 해서 같이 왔다. 네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이쪽에서 너희 중대장에게 이야기해 볼게.

 

녀석은 이미 제대하고 미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주 제일 하사관 학교 출신 교관답게 중대장과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부대에서는 2호차(부대대장 전용)를 나를 위해 철책으로 보내 준 덕분에, 하루 특박과 외출을 받고는 부대근처 여인숙에서 같이 지낼 수 있었다.

 

- 오빠, 내가 생각이 바꼈다. 옛날에는 오빠를 좋아했었는데,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며 고생스럽게 공부하다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어.

 

회사에서 보내준 미국연수 덕분에 미국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한달 보름의 1차 연수를 끝내고, 다음 연수과정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가는 도중에 콜로라도에 사는 친구에게 며칠 시간을 억지로 내서 들렸다. 친구도 만나고, 그때까지 서로 편지만 주고받던 친구 여동생도 만날 수 있는 양수겹장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그 때는 친구도 여동생도 다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여 지낸지 며칠 지나 여동생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저녁에 나를 불러내 자기 차로 운전해서 데리고 간 작은 카페에서 한 말이었다.

 

그녀는 이말을 하기 전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먼저 설명했었다. 간호학을 전공하는데 그 수많은 의학용어가 외워지지 않아서 포기직전까지 갔었으며, 자살생각까지도 해보았다고 했다. 그녀와 결혼해서 미국에 와서 어떻게 살게 될까를 상상했던 나로서는 크게 실망이 되었지만,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조금씩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내 눈에 비친 미국은 정말 대단했다. 특히 플로리다의 그 찬란한 해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콜로라도에서 친구와 처음 타본 스키도 황홀하기만 했다. 이제 미국에서 살 것으로 상상했다. 비록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달콤한 러브스토리는 아닐지라도, 친구 어머니가 자기 딸을 맺어주기 위해 나를 좋게 보시고 선택했으니 당연히 그렇게 될 줄로 알고 있었다. 아니, 착각하고 있었다.

 

<후기>

에고, 글이 길어져서 오늘은 여기서 가름합니다. '단풍들겠네'님이 쓰신 '34년 만의 재회'라는 글을 보고, 언젠가는 글로 옮겨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만, 계속되는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글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워낙 실속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60명이었던 반에서는 항상 1, 2 등을 했으니까, 일단 공부에서 점수를 땃을 거라고는 생각합니다. 또 어리숙하고 순진하게 보였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자기 딸을 고생시킬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당사자들에게는 별로였는지, 실속있는 연애를 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ㅎㅎㅎ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저절로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가 그냥 채인 셈이었던 거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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