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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악법도 법이다

(2012년 9월 19일)

 

제주에 살면서 가장 경악한 일 중의 하나가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다. 빨간 신호등에 걸려서 대기하고 있는데, 뒤에 오는 차가 옆 차선으로 멈춤도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한적한 변두리 길이기는 했지만, 왕복 4차선으로 메인 도로였다.


198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연수를 받았던 적이 있다. 같이 갔던 동료의 친구 형님되는 분이 다운타운에서 테리야끼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비용을 아끼기 위해 그 분 집에 거처를 정하고 서니베일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을 했었다.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고, 아침 7시에 시작하는 교육시간에 맞추기 위해 집에서는 5시도 되기 전인 컴컴한 새벽에 출발했다. 차가 거의 지나지 않는 새벽에도 신호등은 교대로 바뀌었고, 때로는 오가는 차 하나 없는 거리에서 신호대기로 한참씩 기다려야 했다.

연수 중에 운전면허를 받아 운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는 나는, 한국인답게 요령(?)을 부렸다. 신호에 걸리면 잠깐 섰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으면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뒤에서 누가 요란하게 혼(한국에서는 크락션이라는 잘못된 영어를 사용)을 울렸다. 웬만해선 혼을 누루지 않는 그들이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경고한 것이리라. 무얼 훔치다 발각된 사람처럼 무척 창피했고, 다시는 신호를 무시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저녁모임을 갖다가, 신호를 지키지 않는 차들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 했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곳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 적당히 눈치보고 지나가면 된다고 오히려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교통질서는 모두가 지키기로 한 약속 아닌가! 하는 생각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한국의 주요 관광지로 외국인들이 이를 보면 얼마나 놀랄까? 라는 창피함 반, 두려움 반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최근에 집 주변에 도로공사가 마무리 되면서, 없었던 신호등이 2~3백 미터 내에 6개나 생겼고, 9월 1일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이제 집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는 반드시 신호등에 걸렸고, 아무런 차량이 오가지 않는 곳에서 몇 분씩 기다리게 되었다. 저 골목에서 하루에 차가 몇 대나 나올까 생각되는 곳을 위해 좌회전 신호와 직진신호가 메인도로와 똑같은 길이로 신호를 준다. 이 동네에서 산지 만 2년이 되어가니, 차량의 흐름에는 익숙하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신호를 지키지 않고 지나 다닌다. 이곳에 익숙하지 않는 이방인들만이 지나다가 신호가 있으니 설 뿐이다. 이제 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미친 놈들, 여기에 왜 신호등을 만들어 놓은 거야!' 하는 불평을 하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대신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곳에 갑자기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신호등을 설치한 것만은 아니다. 시내에 정말로 신호등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는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 신호등이 없을까? 생각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은 도로가 좁기 때문인지 대부분 직진과 좌회전 신호가 동시에 들어오는 동시신호 교차로가 많다. 즉 대기 시간이 길다는 뜻이다. 한참을 기다려 지나려 하는데, 2~30 미터 떨어진 곳의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를 사람들은 차들을 무시한 채 건너기 시작한다. 차들은 몇 대 건너가지 못하고 신호는 끊겨 버린 채, 차들은 뒤섞여 엉망이 된다.

현장을 조사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탁상행정이 이런 모순과 불편함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곳에 신호등을 설치하기 전에,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지나는 차량을 조사하는 행위를 했다고 믿기 어렵다.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 하기도 한다.

- 교차로 하나에 신호등 설치하면 얼맙니까? 천만 원도 넘어요! 다 업자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사실이 아닌 헛소문이기 바라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많다. '불법 주정차 단속'이라는 팻말 아래 주정차하고, 2~30 미터 내에 무료 주차장이 있는 데도 길가 양편에 주차하는 무질서가 오히려 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한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난 주에도, '중앙선 침범'이라는 큰 죄목(?)으로 교통경찰에게 단속되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저지르는 불법(?)이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이번에는 계도로 끝냅니다.'라는 고맙기 그지 없는 말(?)을 들었다. '걸리는 게 죄'라는 개념이 상식(?)이 된 사회일까? 한 나라의 지도자인 대통령부터 제주라는 시골의 일반백성까지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라는 사고가 일반화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상념이 든다.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하고, 일단 만들어진 법은 '악법도 법이다!'라고 외치고 죽어간 소크라테스를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일반백성도.

그나저나, 나는 오늘도 '이걸 지켜야 돼, 말아야 돼!'를 고민하며 신호등을 지날 것 같다.

- 200 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에 6개나 갑자기 걸린 신호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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