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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의료보험 이야기

(2011년 2월)

 

- 보험은 오늘부터 적용됩니다.

 

- 이달부터 만 원 정도 추가되어 5만 2천 원 가량의 보험료가 청구될 겁니다.

 

- 선생님은 사모님 동거인으로 적용이 되기 때문에 덕을 보는 겁니다. 혼자라면 외국인이기 때문에 8만원이 넘습니다.

 

- 병원에 갈 때는 보험카드를 가급적 소지하셔야 합니다. 일부 병원에서는 컴퓨터에 안 뜰 수가 있거든요.

 

- 보험수가는 일 년에 한번 11월에 조정이 됩니다. 12월에 집을 구입하셨기 때문에 현재는 무주택자로 지역보험에 해당이 됩니다. 집을 파신 분이 보험료를 조정해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되면 보험료가 오르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년 11월부터 적용됩니다.

 

- 선생님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주소가 옮겨지지 않습니다. 만약 이사를 하게 되면 반드시 이곳 공단 사무실에 들려 주소를 바꾸셔야 합니다. 주소를 안 바꾸면 동거인 자격을 잃게 되고 보험료가 올라갑니다.

 

무척 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던 옛날의 관공서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석에 앉아 창구 위에 달린 전광판에 내가 가진 번호가 뜨길 기다리면 되었다.

 

중학생 시절 부모님 심부름으로 호적등초본을 떼기 위해 구청 차디찬 나무의자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던 생각이 순간 되살아났다. 나보다 늦게 온 어른들은 담배 값 몇 푼 쥐어주고 금방금방 서류를 받아갔었지만 까까머리 남루한 교복차림 꼬마인 나는 서류 한 장 받기위해 그날 못 받고 다음날도 가서 무작정 기다리기도 했던 기억이 왜 떠오르는 걸까?

 

한국에서 공식명칭은 ‘의료보험’이 아닌 ‘국민건강보험’이다. 귀국한지 3개월이 지나 국민건강보험공단 제주지사에 들려 보험카드를 받았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창구의 여직원은 지금 당장 사용이 가능하다며 카드에 비닐커버까지 씌워 건네주면서 물어보지도 않은 주의사항까지 상세하게 덧붙인다.

 

국민보험이라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의료보험을 갖는다. 직장에 소속된 사람은 직장건강보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역건강보험에 소속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의료보험 걱정이 없다. 나 역시도 2년 전 실업자가 되기까지는 의료보험을 걱정해 본적이 없었다. 아니, 부모님 덕인지 아니면 운동을 게을리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병원에 갈 일이 별로 없었던 덕분에, 보험이 없어졌어도 그다지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알러지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후로는 그것마저도 좋아졌다.

 

그러나 보험은 보험이다. 있을 때는 정기검진도 하고 위내시경이나 전립선 검사도 받았지만, 없어지니 그런 사치(?)는 생각할 수가 없다. 50이 넘으면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전립선, 유방암, 백내장 검사도 해야 한다는데, 찜찜하지만 그냥 재수에 맡길 수밖에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의료보험의 백미는 지역의료보험이라는 생각이다. 재산세에 따라 보험수가가 결정된다. 재산이 많으면 보험료를 많이 내고 재산이 없으면 적게 낸다. 즉 있는 사람의 돈으로 없는 사람이 혜택을 보는 것이다. 나에게 집을 판 사람이, 재산이 줄어들었으니 보험료를 조정해 달라고 요청을 하면 그 사람의 보험료는 내려가고 내 보험료는 올라간다. 그러나 집을 판 사람이 직장보험에 소속되었다면 그 사람은 재산에 따라 보험료가 적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보험료 조정을 요청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는 시스템인지도 모르겠다.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하는 의료보험제도를 정확히는 모른다. 한국처럼 전 국민을 의료보험 가입시키려 한다는 것 밖에. 그 세부사항이 워낙 복잡하여 전문가들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는 매스컴에서 들었다.

 

한국의 시스템을 미국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Los Coyotes 골프장 주변의 멋있는 주택에 사는 분들에게 McComber Creek Apartment에 사는 영세민들 의료보험을 강제로 부담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쓸데없는 의문에 쓴 웃음만 나온다.

 

운동 삼아 길을 걷는다. 차로 가면 십분도 안 걸리는 마트지만, 가는 데 한 시간 돌아오는 데 한 시간이다. 반상회에 참석할 분들에게 대접할 다과를 사서 백팩에 넣고 매고 오는 길이다.

 

전날 종일 내린 눈이 나무들 가지에 얹혀 밤을 새웠나 보다. 내려갈 때는 아침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더니 돌아올 때는 한자락 바람에, 인생에 지친 중생들이 번뇌를 내려놓듯 나뭇가지들이 밤새 이고있던 눈꽃들을 떨친다. 좁다란 길 양쪽에 줄 지어선 나무들의 뻗힌 가지로 이루어진 터널을 지나면서 우수수 떨어지는 눈꽃들이 멀리서 보는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가까이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행복은 가진 것에 비례하고 가지고 싶은 것에 반비례한다고 한다. 가진 것을 늘릴 수는 없지만 가지고 싶은 것을 줄일 수는 있다. 지금까지는 가진 것을 키우면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원하는 것을 줄이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행복을 위해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건강이다.

 

<후기>

입법로비가 합법인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이익단체가 의사와 변호사 집단이라고 합니다. 약자인 환자의 건강을 담보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거지요. 물론 변호사 집단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Sue'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의 특수성 때문이라는 거지요. 덕분에 의사들이 내는 의료사고 월 보험료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환자는 의사뿐만 아니라 변호사들까지 수입을 만들어 줘야 하니까요.

 

일하다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에서 4바늘 꿰매고 $3,800의 청구서를 받았던 기억은 악몽에 가깝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의료복지 시스템만큼은 후진국인 미국입니다만, 오바마의 노력으로도 쉽게 고쳐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한국도 의료시스템에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의료사고 문제는 심각하며, MRI나 CT같은 고가의 검사는 의료보험에서 제외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복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국보다는 선진국이라는 생각입니다.


- 집 근처에 핀 동백꽃. 눈을 뒤집어 쓴 빨간 색이 요염하다.


- 집 근처 계곡에 눈이 앉았다. 흰 나무와 흰 바위들이 흑백의 화음을 연출한다.


- 눈내린 산사의 모습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 낙시꾼들이 잡은 고기를 즉석에서 회쳐 소주를 마시고 있다. 나도 한 점 얻어먹었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 학꽁치라고 하는데 처음 먹어보았다.


- 경치보다 작명이 더 맛갈난다.


- 시가 있는 등대길 옆에서는 해녀가 자맥질 한다.


- 집사람과 처형이 톳이라는 해초를 따고 있다.


- 학꽁치는 못잡았지만, 미리 알고 가져온 삼겹살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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