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자!

기억 속에서 최초로 병원에 갔던 기억은 중3이다. 등교 길 만원버스에서 누군가의 구둣발에 발등을 밟혔다. 쓰리고 아팠으나 담임에게 말하고 양호실에 찾아 갈 용기가 없었다. 그깟 걸 갖고 그러냐는 핀잔을 받을 게 두려웠을 것이다. 그냥 지나친 발등은 날마다 무섭게 부어올랐으며, 결국 너무 붓고 아파서 신발을 신지도, 학교에 가지도 못할 정도까지 되었다.


동네 의원의 나이 든 의사는 엄마를 시켜 나를 꼼짝 못하게 붙잡게 하고는 마취도 없이 칼로 째고 피고름을 짜낸 뒤 심지를 넣고 상처를 싸맸다. 살면서 그보다 더 아팠던 기억은 없다. 교련시간에 뙤약볕 아래서 모의총을 들고 행군훈련을 하면서 쓰러질 것 같은 어지럼증을 느껴도, 쌍코피가 주르르 쏟아지고 교관으로부터 양호실에 가라는 말을 듣고서야 양호실이나 숙직실에서 쉴 수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업무지시를 받아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처리했다. 때로는 부당한 처사를 받아도 묵묵히 감수했다. 심지어는 내 잘못이 아닌데도 윗사람의 지시에 의해 내가 뒤집어 쓰고는 부당한 징계를 받았고, 허위서류 작성 같은 부정부패에 관련된 업무처리도, 윗사람의 말이라면 따라야하는 걸로 알았다. 간혹 반항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감수했던 것은, 조직생활에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회사생활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생각으로 살았다. 회사생활이라는 게 항상 힘든 것도 아니고 매월 또박또박 통장으로 입금되는 급여를 생각하면 감내하고 인내할 수 있었다. 모셔야 할 부모님과 처자식이 딸린 가장으로서 힘들다고 내색할 수도, 아프다는 핑계로 할 일을 마다할 수도 없었다. 가장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한 부서의 장이 되었을 때는 돈이 필요했다. 밤늦게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저녁을 사주어야 하고 가끔 회식도 해야 했다. 직원이 3~40명으로 늘어나고 예산이 늘어나면서 유혹도 많아지고 음으로 양으로 무시할 수 없는 압력들이 거세졌다. 실력도 없이 로비와 수완, 인맥으로 사업하는 사람들은 집요했다.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높은 분들의 방에 불려가 충고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ㅇ사장과 어울리며 골프를 치게 되었다. 실력을 늘려주겠다며 아이언 세트도 바꿔주고 연습장에 전담코치도 주선해주었다. 연습장에서 만난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한 후 그는 돌아가려는 내 차 안에 돈뭉치를 던졌다. 500만원이나 되는 큰돈이었다. 소심한 나는 두려웠다. 그는 뇌물로 나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거절한다는 것은 그와 적이 된다는 것을 뜻하므로 물리치기도 힘들었다. 생각 끝에 그에게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 보고하는 것으로 대신했으나, 그때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언젠가는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진리 아닌가. 나는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수단으로 이민을 택했다. 당시 알고 있던 동료들 중에는 뇌물이나 횡령죄로 교도소를 거쳤거나, 아직 교도소 생활을 하는 선배도 있다. 가족들은 대인기피증에 갈려 사람 만나는 것도 피한다고 들었다.


한 달이 넘도록 대통령의 측근 최순실이라는 60살 여성에 의해 온 나라가 난리다. 매일 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다. 몇 주 전만 해도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측근에서 모시며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 교도소와 검찰청을 오가고 있으며, 대통령을 수족 부리듯 하던 막후 실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뉴스에 나온다. 오늘은 체육계를 좌지우지한 차관이었던 사람이 구속될 거라고 한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검찰을 들락거릴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모든 사단의 몸통인 대통령조차 무사할 수 없을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야 아픈 상처에 칼을 대고 피고름을 짜내는 고통을 피할 수 있다.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히 표현해야 쌍코피 터지는 것을 사전에 피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아프고 힘들다고 말하지 못할까. 그런 솔직함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가 있다. 왠지 두렵게 만들고, 왠지 사실로 인정받지 못할 것 같고, 왠지 참고 인내하는 것이 옳은 것 같은 분위기다. 누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할까?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보면서 그것이 권력자 바로 기득권이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있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쫓겨나고 고발당하는 등 온갖 회유와 핍박을 당했다.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은 축출당하고, 힘들다고 표현하면 내처졌다. 부당한 일을 따르고 거짓을 진술하며, 시키는 그대로 따르는 사람만이 살아남아 자리를 지키고 승진까지 누렸다. 상처는 날마다 더 깊게 곪아가는 데도.


이제 남은 것은 고통뿐이다. 상처에 칼을 대고 피고름을 짜내는 일이다. 상처가 오래 될수록 피고름을 모두 제거하는데 몇 날이 필요할 수도 있다. 생살이 찢어지는 그 극심한 고통을 얼마나 오래 견뎌야 할까. 터진 쌍코피가 쉽게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다. 정치, 외교, 경제, 문화, 체육 등 최순실의 마수가 대통령의 힘을 배경으로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곪지 않은 곳이 없다.


예순 살이 넘어서야 아프다고, 힘들다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다, 나이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가진 것을 다 내려놓은 탓일지 모른다. 지켜야 할 지위도 체면도 재산도 다 내려놓은 탓이다. 아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외로우면 외롭다고,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하고, 싫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내 삶을 살겠다. 가식을 벗고 더 이상 타인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련다.


대한민국도 그랬으면 좋겠다. 체면이나 허식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값비싼 명품을 천한 몸에 걸친다고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 몇 위가 뭐 그리 대단할까. 수출 몇 위, 경제 몇 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정말 중요한 것은 국민 다수가 느끼는 행복이고, 그것은 경제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고 공정하게 취급받을 때 가까워진다.


뉴스에서 백만 명이 모였다는 광화문 광장을 보니 깨닫겠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프다는 그들의 외침을 인정하지 않는 정권과 기득권들이 문제라는 것을.


<후기>

중학생 시절 곪은 발 때문에 며칠 학교를 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상처의 흔적이 왼발 바깥쪽 복숭아 뼈 근처에 아직도 남아있을 정도니까요. 그때 학교에서 가르친 제곱근(루트)에 대한 수업을 빼먹어서 이해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험 때 1번 문제가 가장 쉬운 문제로 2의 제곱근을 고르는 것이었는데 틀렸습니다. ±2가 답인데 +√2를 골랐던 겁니다. 수학에서는 오직 이 한 문제만 틀렸기에 기억에 오래 남았지요.


언젠가 아들과 이야기하던 중에 녀석이 그러더군요. 뉴질랜드에서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루트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다고. 스스로 독학해서 깨우쳤다는 겁니다. 순간 뒷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먼저,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영적인 것도 유전이 된다는 박창득 몬시뇰의 강론 말씀이 생각났고, 다음은 혼자 고민하면서도 아빠인 내게 물어보지 않을 정도의 부자관계이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녀석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겁니다. 이제 깨닫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외로우면 외롭다고 말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세상은 결코 좋아질 수 없습니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탄핵 무효표와 샤이 트럼프 지지자들  (0) 2016.12.12
Dynamic Korea  (0) 2016.12.06
반동(反動)의 시대  (0) 2016.11.13
비정상 사람, 비정상 대통령  (0) 2016.10.30
행복과 전쟁  (0) 2016.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