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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친구 이야기 (2)

(2013년 6월 14일에 쓴 글)

 

- 손주가 그렇게 이쁘더라. 지난 주말에 아들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왔었거든. 이놈이 6개월 정도 되니까 낯가림을 하는지, 내가 안으니까 우는 거야. 거 참, 되게 서운하데!


- 외할아버지가 예순살인데, 울산에 살고 있거든. 정년은 했지. 아이를 봐주고 싶다고 서울로 오겠다는 거야. 처음에 듣고는 농담인줄 알았어. 아기 돌보는 게 쉽지 않기도 하지만, 집을 떠나 장시간 서울에 머물며 아기를 봐준다고 하니까 농담인줄 안 거야. 그런데 진담이더라고! 나도 놀랐다니까. 그만큼 이쁘다는 거겠지.


B는 몇 되지 않는 내 절친 중의 하나다. 학창시절에는 하도 붙어 다녀서 그의 이름과 내 이름을 붙여서 불렀고, 따로 따로 다니면 오히려 이상하게 볼 지경이었다. 이 친구가 결혼하고 4개월 후에 나도 서둘러 결혼 했었다. 이 친구가 아들을 낳고 4~5개월 후에 나는 딸 쌍둥이를 얻었고, 이 친구가 딸을 얻고 4~5개월 후에 나는 아들을 낳았다.


항상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친구였다. 재테크에도 밝아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고, 모든 면에서 내게는 귀감이 되는 친구로, 살아오면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조언을 구하기도 했던 친구였다. 번개모임에서 손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재작년 11월에 결혼한 아들이 남자아기를 낳아 할아버지가 된지 6개월이 되었으나, 그동안 연락을 끊고 지낸 덕분에 모르고 있었다.


번개모임 다음날이자, 한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 저녁 친구에게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지하철 역에 나타난 친구와 길거리 소줏집에 자리를 잡았다.


- 너 봤지, 어제 그놈 고집 좀 봐. 아무 것도 아닌 일 가지고 난리를 치잖아! 나이 먹어가면서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 참고 넘어갈 줄을 몰라, 문제는 자기 아이들에게도 똑같다는 거지.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강조하면서 아이들의 인생에 참견하려고 하는 거야.


친구는 엊저녁 번개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7시 경에 만나 호프집에 자리 했었다. 치킨과 마른 안주 몇 개를 시켜놓고 다른 친구들 이야기며 지난 이야기들고 시간을 보내는 중에 장님친구는 자꾸 휴대폰을 꺼내 소리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9시를 넘어가자 친구가 약속장소를 정한 친구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 야, 이 자식아! 나는 너희하고 달라. 마누라 눈치를 봐야한다 말야. 배려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영등포로 약속장소를 잡아야 할 것 아냐, 개x꺄! 다른 놈 같으면 나오지도 않아. 듀크가 왔다니까 온 거지. 너 이새끼, 지난 번에 듀크 왔을 때도 여기서 약속장소 잡았잖아.


- 야, 임마!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보통은 너 때문에 항상 영등포에서 만나잖아, 임마. 어쩌다 그런 걸 가지고 왜 지랄야.


- 아냐, 이 새꺄! 너는 항상 너 위주야. 배려심이라곤 x도 없어. 나는 마누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어. 가야 돼. 이 새꺄, 네가 나 영등포까지 책임져.


졸지에 내가 민망해졌다. 녀석을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서 사태를 억지로 수습하고 자리에서 일찍 일어섰고, 나머지 친구들은 2차로 자리를 옮겨 늦은 시간까지 같이 한 듯했다. 영등포 구청으로 가는 2호선에는 사람이 많았다. 너는 며느리나 사위 안 보냐?


- 딸 아이는 사귀는 아이가 있어. 좋은 집안의 아이야. 그런데 아들놈은 영 감감하네. 그 놈은 40이 넘어서 결혼한다더라, 참내.


친구는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릴 때 같은 공간에서 만나 지내다가 친구가 된다. 때론 부모보다 좋았고, 형제보다 가까웠다.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고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정치인과 같은 기성세대에게 반항하며 같이 자랐다. 소주를 마시며 개똥철학을 논했고 써클활동을 하며 밤을 세우기도 했다. 술취한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오바이틀를 도왔고, 친구로부터 등두림을 받으며 쑤셔넣은 술과 안주를 토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회로 나와 각기 자신들의 길을 갔다. 누구는 영업사원으로, 누구는 가전제품 공장으로, 누구는 컴퓨터 회사로, 누구는 프로그래머로 혹은 사업가로 살았고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방법도 다르고 가는 길도 틀렸지만, 그들이 찾았던 것은 한결 같았다. 바로 행복한 삶이었다.


30년이 지났고 40년이 흘렀다. 행복을 찾아나선 그 길에서 그들은 모두 행복을 찾았을까?


- 걔 와이프도 골치 아파! 남편이 가만 있으면 좋은데, 자꾸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하는 거야. 특히 아이들 인생에 관여하려고 하는 거야. 요즘 아이들이 좀 똑똑하냐? 그놈 아들도 아는 거야. 자기가 결혼하면 어떻게 될지. 그러니까 자기 아버지에게 한다는 말이 아버지 때문에, 자기는 마흔이 넘어서 결혼하겠다는 거지. 그런데도 그놈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해.


- 임마, 자식이 결혼해서 사는데 애비라는 게 전화나 해서 너 왜 지난 주에 안 왔어? 이번 주에는 올 거지 하고 푸쉬를 하면 요즘 여자인 며느리가 좋아 하겠어?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세상살이 피곤한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요즘은 다 맞벌이를 하는데 어느 여자가 집에서 자기 가족과 같이 지내며 쉬고 싶지 시댁에 가고 싶겠냐?


- 그냥 내버려 둬야 돼! 그래야 자식들도 편하고 지들도 편한 거야. 그 놈이 그걸 몰라요!


친구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부연설명까지 덧붙이고 있었다.


- 너도 알다시피, 내가 얼마나 냉정한 놈이냐? 그런데도 손주를 보니까 그렇게 이쁜 거야.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너는 나보다 아이들에게 집착이 훨씬 강한 놈 아냐? 그러니 네가 손주를 보면 나보다 더할 거다. 너 그 때마다 미국에 갈 거야? 뭐? 아이들이 손주 봐달라고 부탁하면 갈 거라고? 임마, 그런 건 알아서 해야 하는 거야. 요즘 아이들이 그런 일을 부탁하겠어? 부탁하기 전에 네가 알아서 돌봐주겠다고 해야지. 넌 아직 멀었어, 임마!


<후기>

사는 방법이 다르면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출발점은 비슷했지만 행복을 찾아 나선 길이 서로 달랐던 것이,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자 공감대가 한결 축소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수치로 표시한다면, 옛날에는 90% 이상이었던 최대공약수가 지금은 10%도 안 되는 느낌입니다.


옛말에 틀린 것이 별로 없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요? 월남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친척들이 별로 없었기도 했지만, 한 때는 형제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아무 말이나 툭 던져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형이나 동생을 보면서, 그리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논리를 진리인양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친구를 보면서, 요즘말로 맨붕(?)에 빠집니다.^^


아이들이 저녁에 일찍 퇴근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입니다. 집에 오면 가급적 제 주위에 머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에 사는 친구들에 비하면 해준 것이 별로 없는 많이 부족한 애비지만, 핏줄의 정을 나누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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