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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추억 속의 사람들 (3)

(2013년 5월 25일에 쓴 글)

 

인간(人間)이란 단어를 보면 '인(人)'자는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이고, '간(間)'자는 단수(單數)로는 성립되는 글자가 아니므로 결국 혼자서는 의미가 없는 개체라고 생각한다. 태어나면서 부모형제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친구를 사귀고 이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좋은 사람도 만나게 되지만, 같이 있기조차 싫더라도 억지로 함께 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에게서 얻어지는 즐거움과 행복도 커다란 인생지락(人生之樂)이지만,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도 그만큼 커서 지울 수 없는 고통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따라다니기도 한다. 옛말에 부모복, 처복, 자식복 즉 인복(人福)이 모든 복 중에서 으뜸이라고 했다.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큰 복이나 행운으로 여겼던 것이다. 미간(眉間)이 넓으면 인복이 있다고 했던가!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같이 있어 즐거운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옛날에는 참 좋은 관계였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소원해져서 연락조차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다. 나를 좋게 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형편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게다. 내게 신세진 사람도 있고,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적지 않은 은혜를 베푼 사람도 있다. 미국에서 알게 된 많은 분들과 헤어지게 되었지만, 제주에 와서 새로 알게 된 사람도 있고, 또 이 카페를 통해서 만난 분들도 있다. 어디를 가던지 어디에서 살던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 몇 번의 만남으로 사람이 어떻다 평가한다는 것은 잘못이지만, 사람을 보면 우선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회통념상 살아가면서 곧잘 그릇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다. 처음 만나거나 잘 모르는 사람일 경우, 결국 그 사람이 지닌 외형만 가지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유다. 생긴 것이 어떤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지방 출신인지를 따져 선입관을 갖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뉴저지 덴빌에 살 때, 앞 집에 사는 이태리 나폴리 출신 프레드는 같은 이태리 사람들인데도 내가 살던 집에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험담을 많이 했었다. 같은 이태리인데도 남부 이태리인이었던 것이다. 다 같은 영국인으로 보이지만 잉글리쉬나 스카티쉬, 아이리쉬끼리 서로 좋지 않게 평가하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 그 사람 말야, 사람이 왜 그리 지저분하게 생겼어! 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말하는 것은 왜 또 그 모양야! 데데거리잖아! 그런데 괜찮겠어? 당신이 데려다 쓸 사람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겠지만 말야!

 

모회사에서 똑똑하다고 소문난 직원을 과장급으로 스타웃하기로 결정한 후, 그 친구를 만나본 사장님이 내게 했던 말이다. ㅇ과장의 인상은 실상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그를 좋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난한 환경에서 공고를 졸업하고 취직한 그는, 같은 동네에 사는 너댓 살 어린 가난한 여학생을 자기 월급으로 인문계 고등학교 공부시키고 대학 약학과에 진학시켜 등록금을 대주고 졸업한 후 결혼했다고 들었다. 사실인지 확인한 것은 아니지는 않았지만, 약국을 운영하는 와이프 덕에 넉넉하게 산다는 말을 들었었다.

 

예상대로 그는 성실하게 일했고, 나와도 호흡이 잘 맞았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이민을 떠난 후, 그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는 이야기를 훨씬 나중에 들었었다. 토론토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어디에서든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가장 마음 아프게 추억에 남아있는 사람은 ㅂ과장이다.

 

- 안 된다, 마! 꿈 깨라. 장부장 마음은 알겠는데, 가는 절대로 모회사를 관 두고 부산을 떠날 사람이 아니다. 데리고 오믄야 얼매나 좋겠노! 가같은 실력자가 자네 같은 사람 만나서 일하믄 얼매나 좋나 말이지. 근데, 가는 안 된다카이.

 

ㅂ과장을 스카웃하기 위해서 그를 잘 아는 부산 지사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일언지하에 안 될 거라고 잘라 말했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끈질기게 매달렸다. 당시 미국에서 수입하는 원방감시제어 시스템(SCADA: Supervisory Control And Data Acquisition System)을 국산화시켜야겠다는 절대 목표가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수시로 그에게 전화했다. 과장 3호봉 대우를 약속했고, 국산화에 대한 전권을 주겠다고도 했다. 부산 근처에 출장을 가게 되면 그를 만나 설득했고, 미국에 출장 가서도 그에게 전화했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로 그를 못살게 굴었다.

 

내가 듣는 풍문에 의하면 그는 천재였다. 사실여부를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1960년 생인 그는 형제들과 함께 부산의 어느 고아원에서 자랐다. 돈이 없어 문교부 학력인정 '부산△△고등공업 전수학교'를 야간으로 겨우 졸업하고 고졸입사를 통해 들어왔는데, 그가 해결하지 못하는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는 거다. 그는 회로도만 보면 전기가 가는 길이 보인다고 할 정도로 도면을 읽는다고 했다. 자동차건 오토바이건 가전제품이든 그가 손대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그는 그가 속한 부서의 보물이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던가! 그는 결국 내게로 왔고, 나는 약속대로 그를 미국의 제작회사에 1년 연수를 보냈다. 결재를 위해 사장실에 들렸을 때,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모회사에서는 미국 지사장까지 지낸 분답게 사장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 당신이 그렇게 칭찬을 하니까, 과장 3호봉 주는 것은 괜찮아. 그런데 꼭 그 친구를 미국에 보내야겠어? 사람이 그렇게 없어?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친구가 영어가 돼? 영어가 되야 기술을 배워와서 국산화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냐?

 

그래도 그 때는 실무자가 타당성을 들이대고 우기면 들어주는 사장님이었다. 서민적이었고 검소했던 분이었고 소탈했다.

 

- 나는 떠나면 그뿐이야! 실무자는 당신이고 이 회사에 끝까지 남을 사람도 당신이니까, 고생을 하고, 책임지는 것도 결국 다 당신이야!

 

그러면서 결재란에 사인을 하고 허락을 해주었다. 그러나 뒤에 온 사장은 달랐다. 권위적이고 형식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Better Life를 찾아서 4편 참조. 하고싶은 이야기들. 2012.3.19)

 

ㅂ과장이 미국에서 돌아오고 1년 정도 더 있다가 나는 회사를 관두고 이민을 떠났다.

그가 잘 지내고 있는지 항상 궁금했고, 그가 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후기>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에 관한 소식을 물었고, 단편적으로 듣는 소식은 이랬습니다.

 

- 실력은 있지만 사람이 고지식하잖아! 그래서 위에서 찍혀서 마음 고생이 많아. 장부장이 떠나고 나니 바람을 막아줄 사람이 없잖아. 결국 국산화는 했지만, 그 공은 다 다른 놈들이 챙기지, 어디 ㅂ과장 몫으로 남겨 두나.

 

- ㅂ과장이 한강 수계관리 시스템에 참여했던 일로, 중국에 갔었는데 중국 엔지니어들이 그렇게 ㅂ과장을 좋아한다고 그래. 중국은 수 천 년 동안 황하나 양쯔강 범람으로 고생하는 나라잖아. ㅂ과장 실력을 그쪽에서는 인정하나봐.

 

2008년 1월 모친상을 당해 한국에 갔을 때, ㅂ과장이 어디서 들었는지 문상을 왔었습니다. 그 친구가 전해주는 명함에는 'xx전선 □□ 연구소 이사'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학벌을 중시하는 재벌그룹의 계열사였습니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었지요.

 

그런데 최근에 듣는 이야기로는 거기서도 나와서, 지금은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개발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너무 고지식하고 솔직한 게 문제라는 이야기도 곁들여서.


"ㅂ과장, 정말 미안합니다. 그냥 놔두었으면 편하게 잘 있을 사람을 내가 꼬드겨서 고생만 하게 만들었구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요. SCADA 국산화의 원대한 꿈(?)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이루고자 했던 것인데, 내 못난 탓으로 그대만 고생시켰네요.

이제 정년도 60세로 늘어난다는데, 그냥 그 회사에 있었으면 주변에서 인정받으면서 7년은 더 있었을 거고 편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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