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은퇴이야기/제주의 삶

설 단상

(2013년 2월 11일)

 

어려서부터 늘 구정을 샜다. 서울에서 살기도 했고 당시 대통령은 1월 1일을 설이라 하고, 구정은 인정하지도 않았기에 놀지도 않는 날이었지만, 구정이 되어야 만두를 만들고 녹두지짐을 부치는 등 음식을 준비하는 분위기 탓에 설은 역시 신정보다는 구정이었다. 설이라고 해서 시골에 가본 적이 없으니 시골의 설풍경을 알지 못했으나, 제주에 살게 되면서 벌써 세 번째 시골의 설풍경을 보고 있다.

 

마을에 걸린 플랑카드. 설을 맞아 고향을 찾은 사람들을 환영하고, 마을 사람들이 신년하례를 한다는 안내가 적혀있다. 설날이었던 어제 동서댁에 가는 길에 보니, 마을회관마다 수십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아마도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이처럼 신년하례를 하는 것이리라.

 

▼  지난 추석에 같은 장소에 걸렸던 플랑카드에는 고향방문을 환영한다는 내용만 있었다.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서 살다가, 명절날이라도 돌아와서, 어렸을 때부터 봐 와서 과거를 잘 아는 동네 살던 어른들도 찾아뵙고 추억을 더듬으며 덕담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 것이다.

 

 

어떤 분이 지적한대로 '만약에(What if?)'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네거티브 작용만 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양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은 '만약에' 라는 생각을 쉽게 이겨내지 못한다.

 

 ▼ 아랫층에 사는 꼬맹이 형제가 설빔을 곱게 차려입고 세배를 한다고 내 방을 찾아왔다. 이놈들을 보니 'What if?'라는 생각이 들었다.

 

 ▼ 6~7년 전에 아들 장가 보낸 대학친구는 지금쯤 이만한 손주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꼬맹이들로부터 세배를 받았다.

 

 

한국에 살았던 지난날 명절이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만약에 이민이란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두 꼬맹이의 세배를 받으며 이런 질문이 문득 들었다.

 

내게 명절이란 차라리 없는 것 보다 못한 심란한 것이었다. 먼저 회사에서는 부지런히 현금을 만들어야 했다. 모회사에 상납할 금액을 배분받았고, 거래처에 인사할 백화점 상품권이나 구두 상품권을 준비해야 했다. 내게 들어오는 것들도 있었다. 하청업체나 거래처로부터 갈비세트를 받았고, 백화점이나 구두 상품권도 역시 들어왔었다. 돌아가신 선친을 대신해 친지를 방문하기도 했고, 인사차 직장상사를 찾아가는 일도 아주 가끔은 있었다.

 

만약에 그냥 한국에 있었다면, 아마 이제는 누구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차례를 지낸 후, 자식이나 조카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집에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점잖게 덕담이나 늘어놓고 있지는 않았을까! 딸이 결혼하겠다는 녀석도 저녁무렵에는 무언가 들고 찾아왔을 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쉽게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정서를 지니고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포기하고 이민이란 것을 택했을 때, 이런 모든 것은 각오했던 것이다. 음력으로 날이 결정되는 한국의 명절을 미국에서는 거의 모르고 지난다. 물론 한국신문을 보거나 한인타운에서 살면 알고 넘기기는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런가 보다'하며 지날 뿐이다.

 

대신, 쌩스기빙데이나 크리스마스는 잊고 지날 수가 없다. 맨하탄 브로드웨이에서 벌이는 퍼레이드를 TV에서는 몇시간씩 중계를 해주고, 회사에서는 터키라도 한 마리씩 선물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런 행사에 동참을 해야 하는 것인지 당혹스럽기도 하다. 여기에도 끼지 못하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스탠스가, 이민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자세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할로우윈 데이에는 코스튬을 하고 12월 31일에는 타임스퀘어에 타임볼이 떨어지는 것을 보겠다면서 맨하탄에 가는, 한국인이라기 보다는 미국인에 더 가까운 아이들을 보며 이민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위안을 삼을 뿐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쉽게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이제 내가 나고 자란 내 나라에 돌아와서 살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다. 저 플랭카드에 적힌 신년하례에 참석할 자격이 없으니까.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을 받아들이고 그저 담담히 살아갈 뿐이다.

 

<후기>

성인이 된 후에 맞는 명절은 항상 부담스러운 어떤 것이었습니다. 월남가족으로 친척들도 별로 없으며, 찾아갈 고향이나 선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또 그렇다고 이것저것 생각하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상태로 어정쩡하게 보내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일가를 이루었으니 옛날과는 많이 틀려졌을 겁니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었다면.

 

어느덧 세번째 설을 맞으면서, 설을 소재로 이야기를 꾸며 보았습니다.

아래 사진은 설대목을 맞은 제주 5일장의 모습입니다.

 

'은퇴이야기 > 제주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로 걷는 올레길  (0) 2013.11.17
최선생 집들이  (0) 2013.11.17
제주의 밀감  (0) 2013.11.15
제주사랑  (0) 2013.11.15
눈의 추억(雪追)  (0) 2013.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