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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손

아침에 일어나면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뻑뻑해서 주먹을 쥐느라고 힘을 가하면 통증이 온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지라 아침에 일어나서 밥 한 술을 뜨고 현장으로 나간다. 일이 복잡하거나 힘든 것은 아니다. 단지 바깥에서 아무 데나 땅바닥에 앉아 단순한 작업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눈대중으로 길이를 재고 손가락 두께의 케이블을 적당하게 자른 후 케이블 양 끝에 손바닥만 한 전자기기를 연결한다.


한쪽 끝은 대문 문패 근처에 나사로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은 수도계량기 위에 실리콘 접착제로 부착한다. 케이블은 가급적 눈에 안 띄는 곳에 보기 좋게 고정시키고 난 후, 설치된 장치와 케이블을 단말기로 촬영하고 기기와 계량기 번호를 적은 스티커를 붙이면 끝나는 일이다. 물론 전체 기기가 제대로 설치되었는지 PDA(Personal Digital Assistance)라고 불리는 단말기로 확인해야 한다.


◀ 우측은 수도계량기 위에 부착된 카메라이고, 좌측은 대문 밖에 설치되는 단말기로 서로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다. 가운데 스마트폰처럼 보이는 것이 PDA로 단말기에 연결하면 화면에 계량기의 숫자가 보인다.


간단한 작업이지만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고, 수도 계량기와 대문까지의 거리와 케이블 경로 등 작업환경에 따라 쉬운 곳도 있는 반면 어려운 곳도 있다. 내게 어려운 일은 케이블을 고정시키기 위해 콘크리트에 나사가 들어갈 구멍을 내는 일과 협소한 장소에서 작업하는 경우다. 케이블을 기기와 연결하는 일은 시간을 요한다. 케이블 피복을 벗기고 심선 열 가닥을 일일이 까서 손가락으로 연결한 후 튜브를 씌워 열을 가해 압축하는 일은 오래 걸린다.


시간은 잘 간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두어 집을 방문해서 설치하다 보면 점심때가 되고 또 오후에 정신없이 돌다 보면 컴컴해져서 더 이상 작업할 수 없게 된다. 집에 와서 샤워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한 탓인지 쉽게 잠에 빠진다.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지만 운동은 언감생심이다. 아침까지도 몸뚱이 이곳저곳에 가벼운 통증이 남아있어 아침 뉴스만 잠깐 보다가 나간다.


- 요즘 뭐하고 지내십니까? 혹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11월 한 달 일할 생각 없으십니까? 일이 힘든 건 아닌데 길바닥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12월 초까지 끝내야 하는 물량이 많아서 좀 도와주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제주에서 사귄 P로부터 오랜만에 전화를 받은 것은 열흘 전쯤이었다. 마침 무기력증에 빠져 글을 쓰기는커녕 책을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딸아이를 보내고 제주로 돌아온 후에 자책감이 몹시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평범한 삶을 뿌리치고 이민이라는 극단의 시도를 했지? 남들처럼 명절이나 생일날 자식들이 오가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지? 아이가 남기고 간 가슴의 구멍에 그런 자책이 차지했다.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좋다고 대답했다. 한 달 동안 막일이라도 해서 무력감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그의 일을 거들었다. 제주는 아파트보다 일반주택이 훨씬 많다. 수도계량기는 대부분 대문 안에 있지만 낮에는 거의 빈 집들이라 검침할 수가 없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개발된 기기였다. 계량기 눈금을 볼 수 있는 소형 카메라를 계량기 위에 부착시키고 대문 밖에 있는 단말기에서 보는 것이다. 검침원은 집안으로 들어갈 필요 없이 밖에서 검침할 수 있다.


계약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단지 내가 현역으로 일할 때는 이런 시스템을 고안하고 공사를 설계하는 일을 했었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을 뿐이었다. 그때는 누가 그 일을 하는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공사업체로부터 공사진도를 보고 받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주었으며 진척에 따라 공사비를 지불하면 그만이었다. 이제는 그 최종단계에서 일하게 되었다.


제주시청의 젊은 공무원이 가끔 나와서 작업현장을 둘러보고 갔다. 그럴 때마다 하청업체 직원이 나와 배관을 길게 해라, 테이핑을 해라는 둥의 추가 작업을 지시했다. 하청업체로부터 모든 자재를 공급받고 재하청을 받아 단순 설치만 하는 P는 한 가정 설치에 만 3천 원을 받는다고 했다. 12월 초까지 6주에 끝내야 하는 가구 수가 420개 곳이라, 계산상으로는 하루에 10가구만 하면 되지만, 일요일과 비가 와서 작업할 수 없는 날을 빼면 하루에 13~15가구를 끝내야 한다.


나보다 한 살이 어리지만 힘이 장사인 P는 혼자 하루에 7~8가구, 빠르면 10가구까지 한다. 손이 빠르지 못한 나는 P처럼 작업속도를 낼 수가 없을뿐더러 일주일에 6일 일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곤란하다. 엊그제는 어느 가정의 창고 구석에 위치한 계량기 위에서 불편하게 작업하다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왼팔 전체에 벌레에 물린 것처럼 두드러기가 나타나 가려워서 밤을 꼬박 새웠다. 약사가 보더니 알러지 물질에 접촉한 것 같다며 약을 주었다.


지난주에는 비가 자주 와서 일을 자주 쉬었다. 이번 주 들어 3일째인 어제는 케이블 피복을 벗겨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계속 반복되는 작업에 손아귀에 힘을 줄 수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날씨까지 갑자기 추워졌다. 땅바닥에 앉아 케이블 작업을 하는 동안 뜬금없이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친하지 않았던 나는 아버지의 손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손이 거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손가락 마디가 참 보기 싫게 굵었다. 왜 손가락 마디가 저럴까.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그래, 아버지는 이런 일을 한 거야! 이런 일을 몇 년 만하면 내 손가락도 그렇게 되지 않겠어? 아침이면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 게 왜이겠어? 하루 종일 손과 손가락을 움직이는 일을 했던 거야. 작업용 장갑을 벗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부터 손가락 뿌리까지 일직선으로 반듯하다. 그 위에 아버지의 손을 겹쳐본다. 거치른 손등. 손가락마다 굵은 마디가 두 개 씩 보인다.


평생을 입과 펜으로만 먹고 살았다. 평생을 망치질, 톱질과 대패질로 산 아버지의 손과 같을 수는 없다. 손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읊조렸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후기>

완전 3D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나는 3일 이상 계속해서 못하겠다고 하고는 오늘은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많이 가라앉기는 했어도 아직도 팔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울긋불긋하고 근질거립니다. 도와달라는 말에 덜컥 약속하고 말았으니 어떻게든 약속한 한 달은 지겨야겠지요.


이런 일을 해보지 않았다면 아버지를 떠올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 생전에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무능했던 게 아니라, Wrong time(한국전쟁)에 Wrong place(북한)에 있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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