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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집과 이웃 (1)

(2012년 7월 26일)

 

재작년 말, 제주에 내려와서 집을 찾으러 다녔을 때는 참 당혹스러웠다.

듣던 말과는 틀리게, 전세는 없었고, 집값도 예상과는 달리 많이 비쌌다. 제주에는 '신구간'이라고 불리는 이사철이 따로 있다고는 하지만 -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 전세든 판매든 일단 시장에 나온 집이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까지 와서 월세를 얻을 수는 없었고, 또 이삿짐 때문에 원룸에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았을 때도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으나, 나온 집이 없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더러, 일단 가격대가 괜찮았다는 것이 가장 큰 선택의 이유였다. 거기다가 우리가 집을 보고 망설이는 사이에, 우리보다 30분 늦게 보러 온 사람들이 우리가 사지 않으면 자기네가 사겠다고 하니 서둘지 않을 수도 없었다. 8천만원에 나온 집을 백 오십을 깎기로 하고 집주인과 구두합의를 보았는데, 나중에 온 사람들이 자기네는 8천만원을 다 주겠다고 집주인에게 오퍼를 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한푼도 깎지 못하고 다 주겠다고 이미 본 합의를 번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먼저 집을 본 사람이 의향이 있을 경우 우선권이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 온 사람이 먼저 온 사람을 제끼고 더 주겠다고 하는 것은 상거래상 도리가 아니라고 복덕방 사람이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 보이는 부엌의 구조를 집사람이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장식장 겸 칸막이를 설치하고 화분으로 가렸다.


우여곡절 끝에, 어쨋거나 집은 샀고, 집사람은 수리에 들어갔다. 베란다 샷시를 새로 하고 화장실을 개보수하고, 붙박이 장을 설치하고, 도배를 하는데 또 천만원 이상이 들었다. 2002년에 지었다는 이 연립주택은 두 동이 있는데 A동은 35평형으로 한 층에 두 가구씩 3층 건물로 6가구가 있고, B동은 28평형으로 4개층에 8가구가 있다. 앞 동인 B동에 사는 김선생은 오래 전에 6천만원 주고 샀다고 한다. 45년생인 그 분은 볼티모어에 사는 아들집에 해마다 간다고 했다.


제주 토박이 출신으로 국민학교 동창과 맺어진 그 분은 참 독특한 생활을 한다. 제주 법원장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의 바람대로 S대 법대를 나왔지만, 사법고시에는 실패해서 직장생활로 은퇴했다는데, 기타와 바둑, 독서 등으로 소일하며, 취침시간이 새벽 3~4시고 기상시간이 점심시간이다. 남들 점심시간이 아침식사 시간인 셈이다. 한밤의 평화와 고요함을 즐긴다는 것이지만, 그 분과 바둑을 두고 나면 초저녁 잠이 많은 나로서는 바둑으로 예민해진 신경과 잠자리 타임을 놓쳐 잠을 설치기 일쑤라 그분과 바둑두기는 포기했다.


김선생 부부는 젊었을 때, 서울에 유학하며 애틋한 사랑을 했던 모양이다. 법관이 되고 나서 결혼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한 두 분의 사랑은, 늙어서 볼품이 없어진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밤과 낮을 뒤바꿔 사는 남편을, 어린아이 다루는 듯 하며 사는 자매님을 그렇게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해마다 간다는 미국 아들집을 금년에는 건너뛴 것을 보면, 작년의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작년에 손주들과 롤러스케이트 장에 갔다가 넘어져 어깨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갔고, 그 병원비가 만 오천 불이나 나왔다고 한다. 이 분은 의사인 사위 앞으로 의료보험 피보험자로 되어 있어서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료는 한 푼도 내지 않는다는데, 한국에서라면 말이 되지않는 일(?)을 겪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아랫층에는 해병대 중사 부부가 아들 둘을 데리고 세들어 살고 있다. 이 친구를 알게 된 것은 작년 웃지못할 소동을 겪으면서다. 연립주택의 진입로 옆이 미니 계곡겸 하천으로, 평상시에는 물이 없으니 그냥 계곡이고 비가 많이 올 때는 물이 흘러 하천이 된다.


- 작년 장마 때 계곡으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 폭우가 쏟아진 직후에는 이렇듯 흙탕물이 폭포처럼 흐른다. 유량이 많을 때는 폭포와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이 장관이다.


- 시간이 지나면서 유량은 줄고, 물은 맑아지다가 하루 이틀 지나면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화산지역이라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 '무이파'라는 태풍이 지난 때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고 집안에 갇혀 꼼짝도 못하고 태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늦은 저녁무렵 바람도 잦아지고 비도 그쳐갔다. 순가 장난기 서린 동심이 들었다. 쏴아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물구경을 하고 싶어진 것이다.


늦은 저녁이고 집 바로 옆이라 아무 생각없이 파자마 바람으로 나갔고, 집사람까지 뒤따라 나섰는데 그만 현관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밧데리가 방전되었는지 전원이 들어오지 않은 전자키는 어떤 것으로도 열리지 않았다. 전화는 커녕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전화를 빌려 A/S 센터에 전화를 하니 9V 밧데리가 있어야 한다는데, 어느 집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그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그 친구 차를 타고 밧데리를 사러 다녔고, 몇 군데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밧데리를 구해서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런 사정으로 알게 된 그 젊은 친구는, 남자인 내가 봐도 남자 중의 남자였다. 탄탄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매에, 항상 밝은 표정, 환한 미소를 짓고 다니는 무척 가정적인 남자였다.


제주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며 제대 후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세상에 대해 이해하려는 폭넓은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부부관 자녀관 등 모든 면에서 확고한 신념과 옳고 그름에 대한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사회적인 지위를 떠나, 저런 남자와 사는 여자는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 생각없이 가정을 꾸려 온 나를 부끄럽게 했다.


- 하하, 저요! 저 사고 많이 쳤습니다. 저 골 때리는 놈이었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한 게 제게는 정말 좋았습니다. 많은 새로운 걸 배웠고,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새로워졌고 사람들을 이해하는 스펙트럼이 생겼지요. 모든 게 다 좋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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