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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가을의 방문객

(2012년 11월 12일에 작성한 글)

 

9월 초에 지나간 마지막 태풍이 유난히 무덥고 짜증나는 여름을 가져가 버린 후,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계속되면서 방문객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가장 먼저 찾아오신 분은 LA에서 지난 8월 초에 스스로 은퇴하시고 제주에 오신 Juneauatom(이하 '아톰'님)이다. 제주에 살고 있는 우리들 보다도, 훨씬 더 제주를 사랑하시고 제주에 연민과 애착을 갖고 계신 것이 무척 인상적인 분이었다.


아톰님 부부와 저녁을 같이 했고, 추석 당일에는 기억에 남는 한라산 등반을 했다. 도치형님을 방문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제주에 사는 사람보다 제주를 더 많이 아는 아톰님 덕분에 우동이 맛있다고 소문난 포도 호텔에서 멋진 풍광과 함께 우동을 먹어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옛날 직장 동료 부부가 추석 직전에 뉴저지에서 일본을 들렀다가 제주를 방문했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삶의 목적을 여행에 둔 듯한 이들 부부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 시간만 나면 여행을 다니고 있다. 동문시장에서 싸고 맛있는 회도 감동적이고, 흑돼지 삼겹살도 맛있다면서 24시간 내내 웃고 즐거워하다가 한국의 친척집에서 추석을 지낸다며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갔다. 오랜만에 내가 알던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미국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아는 사람들을 만나 모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산호세 근처에 살고 있는 사촌 여동생의 남편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은 것은 추석 다음 주 일요일이었다. 미국에서 여행 다닐 때 몇 번 신세를 진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호인인 탓에 늘 마음에 빚이 있던 친구이었는데, 추석 전날 갑작스런 부친상을 당하여 졸지에 왔다고 했다. 제주가 고향이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제주에서 보낸 그는 잠시 교직생활을 하여 얼마간의 유학비용이 생기자 미국으로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이었다.


여권이 만료된 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갑자기 오느라고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비즈니스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어도,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던 그도 마침내 돌아올 결심을 했다. 미국에서 풍치로 고생을 하면서도 여유가 없어 치료를 못했던 이를 이번에 모두 뽑고 말았다. 틀니를 하기에는 아직은 젊은 56살의 나이에 틀니를 맞추느라 엊그제야 돌아갔다. 주변을 정리한 후, 내년 봄이나 여름에 돌아오겠다는 그는 1983년에 갔으니 30년 만에 돌아오는 셈이 된다. 늙으신 모친의 간곡한 부탁이 그의 마음을 바꾼 것 같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을 짠하게 하는 사연들이 많지만, 그 사연들을 몇 개의 문장으로 다 풀어내기는 불가능하다. 부디 돌아오게 되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되찾기만 바랄 뿐이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사이클링하러 제주에 들른 것은 지난 달 마지막 주말이었다. (제 글 '친구의 제주방문' 참조) 제주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처음 찾은 친구들의 방문이었다. 나누고 싶은 사연들이 많았지만, 사이클링만 하고 짧은 만남의 시간에는 겉도는 이야기만 하다 간 놈들에 대한 원망을 글로 옮겼는데, 그 글을 본 친구들이 나를 질책하고 있다. 공개되고 싶지 않은 것을 공개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아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치고 싶은 내게, 보이는 모든 인생을 관찰하고 싶을 뿐이다.


관찰자로서 내 스스로의 인생도 객관화시켜 관찰하고, 내 주변에서 보이는 삶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나름대로 통찰하고 싶다. 그 통찰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에는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렇게 보는 통찰도 있고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는 것을 글로 남기고 싶을 뿐이다. 사이클링 하러 온 친구들을 비난하기 위한 글은 결코 아니었다. 2년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서운함, 더 많은 시간을 가지려는 시도가 없었던 아쉬움, 그리고 경제력이 생각만큼 큰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또 하나의 잊지못할 여인의 방문이 지난 주에 있었다. 미국에서 간호대학을 나와 간호원으로 LA에 사는 친구 여동생이 제주에 패키지 관광을 왔다가 돌아가는 날, 한 시간 남짓 집을 방문했다. 사이클링하러 온 친구들과 같은 그룹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유난히 친했던 그녀의 오빠이자 내 친구는 콜로라도 덴버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중학생이었던 그녀, 잠깐 동안이지만 한 때 나와 결혼 말이 오갔던 그녀, LA에서 내가 손가락에 부상을 입었을 때 실밥을 뽑아준 그녀였다.


필리핀계 이민자로 변호사인 남편과 이혼 중이라는 말은 담담하게 이야기 했다. 플러튼에 있는 집을 팔고, 딸들과 나와서 산다고 한다. 마음이 짠했다. 어제 그녀가 보낸 이메일이다.


Hi brother,

I'm very happy to see you and your wife before I leave. I'm leaving today. Please take care of yourself. Talk to you later.


사연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다들 숱한 사연들을 품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하나 하나 삶의 주인공이고 세계고 우주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모두가 행복하고 마음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랄 뿐이다.


- 포도호텔 레스토랑에서 담소하고 있는 일행들. 좌로부터, 사촌매제, 아톰님, 도치형님 부부, 아내(뒷모습). 아톰님! 맛있는 우동 잘 먹었습니다.


- 옛 직장동료, 앤 부부가 성산 일출봉 근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IT, 그녀는 BA(Business Admin) 파트에서 일 했었다.


- 제주의 청명한 가을 하늘, 그리고 언덕 아래 멀리 보이는 바다가 비슷한 빛깔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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