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친구 이야기

(2012년 8월 4일)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에 있던 아이들 11명이 써클을 만들어 자주 만났다.

써클 이름은 '한소리', 즉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은 소리를 낸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내성적이었던 나는 친구가 별로 없었는데, 친했던 녀석이 나를 자기네들 그룹에 껴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그 친구들에게 낄 수 있었던 것은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60명이었던 2학년 9반에서 나는 늘 1, 2등을 했었다.


공부를 못했던 두 녀석이 있었다. 한 친구는 화곡동 국군통합병원 근처 '엄'씨 마을에 살았는데 가족이 파라과이로 이민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만 마치고 남미로 농업이민을 갔다. 만약 그 친구 가족이 이민을 가지 않고, 야산에 있었던 논과 밭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대단한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곳은 지금 고층 빌딩의 유흥가로 변해 있으니까. 


다른 한 친구는 당시 1지망, 2지망이 있던 예비고사에서 겨우 2지망에 붙어 공전에 진학했고, 간부 후보생으로 장교로 군대 갔는데, 내가 광주 상무대에서 이등병으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상무대 위병장교로 근무했고, 당시 내게는 하늘 같기만 하던 내부반장을 하인 부리듯 해서, 나를 한동안 몸둘 바를 모르게 만들었었다.


죽은 친구도 있다. 성균관 대학을 졸업하고 ROTC로 군대까지 갔다와서는 직장생활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놀러간 경포대에서 자신의 수영실력을 과신하다가 익사했다. 2남 3녀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그는, 후암동 시장에서 청과물 장사를 하던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밖고 떠났다. 항상 묵묵하시던 아버님은 하늘에서 그 아들을 만났을까!


공부를 잘했던 그 친구가 지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는 미국에서 들었다. SKY를 고집하며 3수를 하던 그 친구는 결국 고시공부로 돌아섰으나, 고시를 패스하지 못하고 교통부 기획실에서 7급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격무로 인한 건강악화로 퇴직한 후, 연락을 끊었었다. 안양에서 슈퍼를 한다는 이야기도 풍문으로 전해들었었는데, 그의 사망소식도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화목한 가정으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친구는 부친이 국민은행 지점장이었다. 기타도 잘 치고 말도 참 잘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탓으로 항상 밝고 명랑했다. 6개월 방위로 제대한 그는 결혼도 일찍 해서, 아들도 가장 빨리 얻었었다. 연애시절 여자친구와 그 아들 돌잔치에 같이 갔던 기억도 있는데, 그 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취직해서 수습사원 마지막 날, 창고에서 근무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쇠조각에 머리를 맞았다고 한다. 작년 그 친구 부친상에 참석해서 수 년 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은 안스럽기 그지 없었다. 온통 하얀 머리에서 그간의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찾으며 신앙 속에서 살고 있다.


ROTC로 제대해서 동방생명(현재 삼성생명)에서 일했던 친구는 IMF 때, 마지막까지 버티다 끝내 '팽'당했다. 삼성 사옥에 자판기 사업을 받아서 그럭저럭 살아온 모양인데, 요즘은 그것도 잘 안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씩씩하게 살고 있고, 큰소리도 여전하다. 친구의 와이프가 백화점에서 아동복 매장을 한다는데, 무척 힘들어 보였다.


역시 전문직이 최고다. 재수해서 연세대 치대를 들어간 친구는 아직도 개인병원을 하고 있다. 재학시절에는 낙제까지 해서 동기들 보다 늦어진 편이었지만, 목동 아파트에 입주자가 없던 시절 그곳에 열었던 병원에서 돈벌고, 강남 한복판으로 이전한 병원에서 성공했다. 한동안 강남에서 일하더니, 지금은 한가한 곳에서 개인병원을 하고 있다.


오류동 달동네에서 살았던 친구는, 변두리에 있는 학교에 2지망으로 간신히 붙었다. 야산 중턱의 흙담집의 그 친구 집에 들어서면 여기 저기서 오리가 '꽥꽥'하고 도망다녔다. 당시에 그의 형이 서울대 법대에 다녔었는데, 어느날 도둑이 들어와 형의 교복만 훔쳐갔었다고 한다. 반기문 총장과 6촌간인 그는 건설회사에서 해외로만 돌았는데, 재벌회사에서 전무까지 올랐다가 지금은 전관예우로 중소기업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전무로 있을 때는 친구들 회식자리 술값은 그의 영업비로 냈었다.


11명 친구들 중에 나를 제외한 8명의 이야기가 끝났다.


나머지 두 놈은 요즘말로 소위 절친이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아닌 것 같다는 뜻이다.) 그 형제들은 물론 웬만한 친척들까지 서로 알고 지냈다. 부모님들은 친자식들 처럼 대했었고, 우리들도 친구 집에 가면 내집 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이 두 친구들은 내 인생 전반을 지배했으니 그 이야기의 길이가 작지 않아 다 옮길 수는 없다.


한 친구는 16살이나 많은 형의 도움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와 지금은 모교에서 교수로 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라고 하던가! 오래 떨어져 살면서 많이 소원해졌다. 무엇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화도 서로 하지 않는다. 미국생활 초창기에는 (한국시간 한밤중) 술먹고는 내게 (미동부시간 한낮에) 전화하곤 했었다. 작년, 친구 아들 결혼식에서 만났을 때, '조만간 제주에 한 번 갈게' 하던 놈이 감감이다. 내가 국적을 바꾼 탓에 미국놈이 되어버렸는지는 몰라도, 그는 참으로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지금까지 옛날의 감정을 이어오는 친구는 콜로라도 덴버에 산다. 3수 끝에 대학에 실패하고 원주 1하사관 학교 조교로 군생활을 한 후, 이민을 간 친구다. 콜로라도 주립대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그 친구는 지금도 회사에서 '데이타베이스 관리자'로 일한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40대 중반을 넘어 결혼한 그 친구가 늦게 본 아들이 겨우 열 한살이다. 지난달 30일 150분인 휴대폰 약정시간이 백 분이 넘게 남아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OTO 글로벌 국제전화'라는 앱을 이용하면 스마트 폰으로 국내전화 처럼 걸 수 있다.


- 제주생활 어떠냐? 지낼 만 하냐?


○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 뭐. 세상살이 다 똑 같지, 좋은 것만 있을 수 있겠냐! 그래 너는 어떠냐?


- 그냥 그래. 아이가 어리니까 10년은 더 일할 생각이었는데, 앞으로 5년만 더 일하기로 했다. 이 나이에 머리 써서 일하려니 힘들어. 집에 와서도 매뉴얼 읽어야 하고, 공부한다는 것이 쉽겠니?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거지. 인터넷이고 스마트 폰 때문에 회사는 계속 다운되고 있으니, 아직까지 회사에 붙어있는 게 다행이지, 뭐.


- 그래도 집이라도 페이오프 해서 다행이야. 돈 있을 때마다 오버페이 해서 몇년 일찍 페이오프 해버렸으니까, 내일 당장 쫓겨난다고 해도 마음은 큰 부담은 없어. 401K도 2~30만 불은 되니까 그럭저럭 살 수 있지 않겠어?


 그래, 수고했다. 우리가 럭셔리하게 살아 온 사람도 아니고, 그만 하면 충분히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맘 편히 살아라.


전화 줘서 고맙다는 친구의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지만, 한 시간 넘게 수다가 이어졌다.


<후기>

로렌스 님의 글을 읽고, 제 친구들과 같이 한 지난 세월이 생각났습니다. 

40년 전의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은 세월에 치인 흔적들로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그래도 만나면 쌍욕을 섞어가며 웃고 떠듭니다. 

건설회사에 다니거나 과천에 살고 있는 집이 10억이 넘는 친구는 그저 'MB'를 찬양하고 새누리당을 노래합니다.

'어휴, 저 병신새끼들' 하며 욕을 해대는 무리들은 노무현을 찬양하고 안철수를 지지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친구입니다.


저도 까까머리 사춘기 시절 읊었던 시 한 편을 적어봅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길을 떠날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라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오' 하고 머리 흔들 그 한 사람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연은 자연 그대로  (0) 2013.11.09
돌아오는 사람들, 떠나려는 사람들  (0) 2013.11.09
추적자 (The Chaser)  (0) 2013.11.09
July Morning  (0) 2013.11.09
사 먹시에 아까운 것들  (0) 2013.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