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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부러운 조카들

4주 전이었던 2월 17일 미 대사관에서 여권을 갱신한 날 조카 녀석이 쿠바로 떠났다. 그것도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유럽을 거쳐 쿠바 하바나로 들어간다고 했다. 밤 비행기를 타는 녀석은 초저녁에 들어와서 배낭에 짐을 꾸리느라 부산을 떨었다. 쿠바라고? 아니 왜? 그곳은 나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91년생이니까 이제 26살인 녀석은 K대 전자과를 졸업한 후, C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여 마지막 학년에 실습으로 쿠바를 선택한 것이다. 녀석이 쿠바를 선택한 이유도 내가 쿠바를 가고 싶은 나라 1순위로 꼽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이 때 묻지 않은 쿠바를 볼 수 있는 최적이라는 것이다. 미국과 수교를 했으니까 미국의 현대문명과 문화로 오염(?)될 것은 시간문제기 때문이다.

 

내년부터 인턴을 하게 되면 정신없이 지내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여행도 다니며 충분히 놀겠다는 계획에는 미국이나 유럽은 의사로 일하면서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현실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녀석이 쿠바에서 실습이 끝나는 대로 최대한 시간을 짜내서, 평소에는 가기 힘든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까지 여행하겠다는 배짱이었으니까. 아르헨티나에서는 남쪽 끝 파타고니아까지 가보겠다는 녀석에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등학생 시절 잠시나마 의대를 꿈꾸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빨리 돈을 벌어 집에 보태야한다는 강박감과 비싼 학비가 엄두 나지 않아 아주 쉽게 포기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또 다시 4년째 의학전문원을 다니면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제 엄마가 반대하는 연애도 하고 학교 그룹사운드 활동까지 젊음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발표회를 할 때는 몇 달 동안 기타 연습에 몰두했다. 그랬기에 장학금 덕을 보았어도 학자금 대출이 수천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니 녀석은 항상 부산하고 정신없이 바쁘다. 대학에 다닐 때는 D.C에 있는 조지워싱턴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냈고, 방학을 이용해서 인도를 한 달 동안이나 배낭여행도 했다. 그렇다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여동생이 그 녀석을 출산했을 때 퇴원시킬 사람이 없어서 내가 업체 사장에게 말해서 차를 보냈을 정도였다. 녀석을 안고 나오는 당시에는 서러움에 아파오는 목울대를 삼켰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구절을 떠올리며, 커서는 세상을 다스리라는 의미가 담긴 녀석에게 지금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형외과를 하겠다는 녀석이 제대로 의사 노릇을 하려면,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포함 군대까지 10년 가까이 필요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세상 살기 힘들어졌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넘치더라도, 학자금 대출은커녕 모기지도 없던 시대에 살았던 나는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부럽기만 하다.

 

연년생인 녀석에겐 한 살 위인 형이 있다. 서울 소재 공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했다. 군 면제 덕분에 4년차 직장생활을 하는 녀석도 정말 재밌게 산다. 3년차였던 작년 연봉이 5만 불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받는 연봉 5만 불은 뉴욕의 10만 불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세금도 훨씬 적은데다가, 일부러 지방에 근무하기 때문에 모든 게 여유롭다.

 

이제 27살의 청년이지만 승용차도 있으며 일 년에 두어 차례는 해외여행을 다닌다. 작년에는 뉴질랜드 어학연수 때 사귄 친구를 만나러 핀란드를 다녀왔다. 축구, 테니스, 야구 등 온갖 스포츠를 즐기며 등산을 갈 때는 유행을 쫓아 아웃도어 패션을 사 입는다. 굳이 서울에 살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서울이 아니더라도 행복을 주는 곳이라면 만족하겠다는 자세다. 오히려 퇴근시간도 없이 일해야 하는 서울이 싫다는 태도다. 어떡하든 서울에서 근무하려던 내 젊은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이 녀석의 나이에 해외연수를 보내준 회사 덕으로 난생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플로리다에 도착해서 크게 놀랐던이유는 똑같은 인간인데 살아가는 방법이 너무 차이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내가 처음 본 미국은 모든 것이 놀랄만큼 화려했다. 조카들도 같은 걸 느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별 것 없던데요."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나는 그 녀석들이 정말 부럽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꿈을 마음대로 펼치며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오히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내 아이들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가며 대학에 다니느라 4년 만에 제대로 졸업한 아이들이 없었다. 물론 못난 부모를 만난 탓이겠지만.

 

그러나 내가 젊었을 때 부모님은 이렇게 말했다. "얘, 지금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내가 이런 세상에 났으면 하고 싶은 것 다했겠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길 했냐, 전쟁이 나길 했냐? 오직 공부만 하면 되는 세상인데. 난 네가 부러워 죽겠다."


<후기>

언젠가 이종사촌 형님에게 들은 말은 이랬습니다. "야, 내가 왜 공부를 못했겠어. 국민학교에 들어가니까 해방이 되어 어수선하고, 중학교에서 공부좀 하려니까 6·25가 터져서 도망 다니느라 공부할 틈이 있었어야지!"


하하하, 그래서 나는 확신합니다. 이 아이들도 내 나이가 되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세상은 더욱 더 좋아지고 있고, 변하지 않는 진리는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지난날의 부모님 나이가 되어 쓸데없는 공상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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