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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종교

정치와 종교라는 토픽만큼 사람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치열한 소재는 없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어느 커뮤니티에서나 이에 대한 글이나 토론은 웬만하면 자제하자는데 의견이 일치하는 이유다. 심지어 모처럼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날에도 정치 이야기를 피하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 60대 이상의 부모와 자식 세대 간에 대화를 단절시켜 분위기를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정치적 인식이 높은 한국인이라 그렇다는 의견도 있지만 공감하지 않는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도, 극우세력이 득세하는 일본이나 서유럽의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다. 갈등의 원인을 이해하기에는 정치보다 종교가 쉽다.  


종교의 근간은 신앙이다. 믿는 사람이 없으면 종교도 없다. 2년 전 동남아를 여행했을 때 가장 특이했던 점은 대중적인 불교이었다. 그들의 불교는 우리와 크게 달랐다. 사찰은 산에 있다는 상식은 최소한 그곳에서는 아니었다. 도시 한가운데 거대한 사찰이 자리했고 몇 백 미터마다 있었다. 재물이 바쳐진 불상과 제단이 상점이나 집집마다 보였다. 동트기 전 새벽마다 벌어지는 탁발 행렬은 장관을 넘어 감동이었다. 여든이 넘은 노파가 어두컴컴한 새벽에 정성스럽게 만든 밥 광주리를 들고 나와 맨발 차림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며 어린 스님들의 행렬을 기다렸다.


그들이 믿는 남방불교는 많이 낯설었으나 분명하게 알 수 있던 것은 그들에게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활이자 삶,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힌두교와 융합된 남방불교 특유의 반수반인의 불상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는 그들에게, 우상숭배 어쩌고 하는 것은 폭력도 그냥 폭력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와 인생 전체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폭력이라는 상상을 쉽게 했다.


어디 불교뿐이겠나. 미국에서 회사 다닐 때 기억이다. 3층에 있는 사무실까지 운동 삼아 계단을 이용하다가, 예기치 못한 인기척에 놀라는 경우가 있었다. 1층 계단 뒤쪽 후미진 곳에 천을 깔고 엎드린 자세로 기도하던 중동 출신 동료이었다. 라마단 기간 중에 정해진 시간마다 메카를 향해 기도할 자리로 인적이 없는 그 구석을 찾았던 거다. 그들에게도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닌 삶, 그 자체라는 증거였다.


나처럼 신앙이 약하거나 없는 사람들은, 종교 때문에 나라가 갈리고 전쟁을 일으켜서 서로 살상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충돌했던 천 년 전의 십자군 전쟁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사랑을 실천한다는 기독교도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 서로 박해하며 폭력을 일삼았던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근의 일이며, 같은 이슬람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갈라져 서로에게 칼과 총부리를 겨누며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개인이나 국가 간 모든 분쟁과 갈등의 원인은 수만 가지일지라도, 폭력으로 치닫는 원인은 오직 하나다. 바로 타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음에 바탕을 둔 종교의 특성상 서로 다른 종교는 타협하기 어렵다. 타협 자체가 자신의 믿음, 즉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과 세계를 부정하는 행위와 다름없는 탓이다.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는 말처럼 폭력적인 언어는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선교활동이나 전도여행이라는 용어를 혐오한다. ‘선교’나 ‘전도’라는 단어에는 ‘옳은 (내)것’을 전파한다는 의미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살인보다 더한 최고의 폭력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고(故) 이태석 신부님처럼 선교가 아닌 의료와 교육 같은 봉사활동이 되어야 마땅하다. 전도는 봉사활동을 하는 중에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 선교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나’도 옳지만 ‘너’도 틀리지 않는다는 논리가 바탕이다.


정치가 종종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종교와 같다.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는 생각, 무조건 자신의 정당을 지지하겠다는 고집이 지배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하다. 타협을 위한 대화는 이견만 들추어냄으로써 부자간에, 형제간에 불화만 초래한다. 젊은것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철이 없는 탓이고, 늙은 꼰대들은 고리타분한 똥고집이라서 그렇다고 서로의 탓으로 전가한다. 역시 내 견해만 맞고 네 건 엉터리라는 주장이 바탕이 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엉터리다.


‘내 것만 맞고 네 것은 틀리다’는 말이 얼마나 엉터리 주장일까. 티베트에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 승려가 되는 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페루나 칠레에서 태어났다면 신부나 수사가 될지언정 승려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구나 경북에서 태어나 ‘새누리당’에 표를 준 사람이, 호남에서 태어났다면 ‘더불어 민주당’이나 ‘국민의 당’ 후보에 투표할 확률이 훨씬 크다. 이성이나 논리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선입견에 의해 좌우된다는 증거이며, 얼마든지 ‘네가 맞고 나는 틀릴 수도 있다’는 근거다.


“난 저 사람 싫어! 저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 좀 봐, 얼마나 건방져! 당대표 되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봐!” 평소 좋아하는 분과 함께 TV를 보다가 그분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내 눈에는 전혀 거들먹거리지도 건방져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분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 원인은 무엇일까. 잘못된 내 선입견 탓일 수도 있겠고 그분의 선입견일 수도 있다. 걸음걸이까지 달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선입견이라는 것이 문제다. 배다른 동생을 만든 아버지의 두 집 살림은 용서할 수 있어도, 술에 취해 하룻밤의 ‘원나잇 스탠드’ 실수를 저지른 남편과는 하루도 같이 할 수 없다는 주장은 모순이 분명하다.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고, 법적인 다툼이 있으면 변호사를 찾는다. 혼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문제는 스스로 전문가가 된다. 혼자 답을 구하기 힘든 문제임에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다. 기껏해야 같은 견해를 가진 친구를 만나 맞장구를 치든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에게 아전인수격 해석을 구한다. 그래서는 옳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이혼한 남편의 여동생은 무조건 오빠 편이고, 아내의 남동생은 들어볼 것도 없이 매형의 잘못이다. 그런 편들기라면 바람 핀 것도 적반하장이 되어 상대방의 탓이 되기 쉽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면,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던 정의가 실제로 정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만큼 이해타산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누가 옳고 누구는 그르다는 이분법적 단순한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해졌어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나만 옳은 것은 아니다.’ 내 종교만 진리가 아니라는 것, 내가 지지했던 정치가가 실상은 가면을 쓴 위선자였다는 것, 아버지의 불륜도 남편의 그것만큼 나쁘다는 것, 사고로 자식을 읽은 남의 슬픔도 내 것의 그것만큼 똑같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기본이다.


나이 오십을 넘으면 '못 배운 놈(?)'이나 '배운 년(?)'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우스개에 공감한다. 전문분야가 아니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었다는 것은 년 전에 알파고가 증명했다. 그 인공지능도 집단지능에게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집단지능으로 최선과 최적을 찾아가는 제도가 민주주의라면, 남의 의견도 내 의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


▼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에서 탁발행렬을 기다리는 80대로 할머니. 광주리와 그릇에는 따듯한 밥과 반찬이 들어있다.


<후기>

정치와 종교를 소재로 삼았을 뿐, 정치와 종교에 대한 글은 아닙니다. 정치와 종교에 대한 대화를 그토록 꺼려하는 이유를 나름 생각했습니다. 최근에는 대통령 탄핵을 지지한다며 분신자살을 한 스님이 있었는가 하면, 엊그제는 탄핵을 반대한다며 투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극단적 선택은 공감할 수 없습니다.


제가 경험한 최악의 소통은 중고등학생 시절의 교장 훈시였습니다.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을 운동장에 열과 오를 맞춰 세워두고, 높은 교단에 올라서서 자기 할 말만 하고 내려가는 행위는 폭력과 다름없었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설정에서나 가능한 일로, 군대나 직장의 계급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기도 하지만, 쌍방향 소통이 개방적이고 원활할수록 효율과 능률이 향상된다는 것이 현대의 조직이론입니다.


정치나 종교에 대한 소재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도, 교장의 훈시 같은 방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말은 전혀 들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자신의 말만 쏟아내려고 합니다. 자신이 높은 교단 위에 있는 교장처럼 말하고 싶고, 상대방은 운동장에 세워둔 아이들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교장의 훈시를 들으면서 거기에 이의를 다는 친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의는커녕 훈시 동안 움직이기만 해도 훈시가 끝난 후, 체육선생이나 교련선생에게 폭행을 당했으니까요.


도널드 트럼프가 설마 그런 교장을 흉내 내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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