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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계란과 외할머니

AI(Avian Influenza)로 불리는 조류독감으로 달걀파동이 일어났다. 역사상 최초로 달걀을 수입한다고 한다. 음식점과 제과제빵업계에서는 필수품이라는 것이다. 도시락 반찬 정도로만 알았던 달걀이 어느덧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한자어로 계란(鷄卵)이라고도 부르며 토종 한국어로 ‘닭의 알’이란 의미의 ‘달걀’은 내게 많은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단어다. 그 기억 때문에 달걀을 일부러 찾아 먹지 않았다.


국민학교 6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경기도로 이사한 부모님은 부업으로 마당 뒤편에 양계장을 짓고 닭을 길렀다. 기억이 희미해서 백 마리인지 2백 마리였던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침저녁으로 진동하는 닭똥 냄새를 맡으며 달걀을 수거하러 다녔고, 늘 사료걱정과 겨울철 난방걱정을 하시던 부모님의 한숨소리를 들었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중학생 시절 여름방학이면 들로 산으로 닭 사료용으로 풀을 뜯으러 다니고, 개천에서 미꾸라지를 양동이로 하나 가득 잡아 닭 모이로 던져주기도 했다. 새가 뱀의 천적이라는 것도 그때 실습으로 알았다. 닭장 안에 뱀을 넣으면 그토록 쌩쌩한 뱀이 움직이지 못했고, 닭들은 좋은 장난감을 만난 듯 요란했다.


양계장을 한다고 계란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깨져서 팔 수 없는 계란만이 반찬으로 만들어져 밥상에 올라왔다. 그것도 새우젓을 양재기에 잔뜩 넣은 계란찜이었다. 계란찜은 윗부분의 거죽만 노란 색의 계란이었고 그 밑에는 짜디짠 새우젓이었다. 그래도 우리들 젓가락의 집중공략 대상은 그 계란찜 양재기였다. 그렇게 귀한 계란을 엄마는 꼭 날로 내게 먹였다. 날도 채 밝지 않아 컴컴한 새벽에 통학기차를 타러 뛰어나가는 나를 붙잡고 강제로 날계란을 먹였다. 지겹도록 맡았던 닭똥냄새가 그 날계란에서 풍겼지만,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위 아래 구멍뚫은 계란을 후딱 마시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끔 닭을 사러오는 동네이웃도 있었다. 엄마는 빌빌거리며 닭장 한쪽에서 졸기만 하는 닭을 찍어두었다가 팔곤 했다. 손님은 다른 닭을 달라고 했지만, 엄마는 뱃속에 들어가면 똥 되는 건 똑같다며(?) 그냥 가져가라고 우겼다. 그나마 사러오는 사람이 없으면 죽기 바로 직전에 우리 차지가 되어 한창 자랄 나이의 나와 동생들의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엄마가 요리하도록 만드는 것은 중학생인 내 몫이었다. 닭의 숨통을 끊어 피를 뺀 뒤,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털을 뜯고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씻었다. 내장 속에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 계란들이 가끔 보였다.


계란과 함께 연상되는 분은 엄마만이 아니다.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를 잊을 수 없다. 당신의 막내딸 살림살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했을까. 외할머니는 우리집 계란을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이동네 저동네로 팔러 다녔다. “엄니, 팔러 다니지 말라니까, 왜 그렇게 말 안 들어!” 힘들게 다니는 노인이 안쓰러운 엄마가 지청구를 해도 막무가내였다. 치마 속 고쟁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백 원짜리 지폐와 동전들을 꺼내놓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작고 동그란 얼굴에, 그러지 않아도 작은 키가 허리가 굽어 더 작아보였던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그 속 고쟁이에서 사탕을 꺼내곤 했다. “내 외손주가 제일 착하다, 공부도 잘하고 엄마에게도 순종하고”


“할머니는 왜 이름이 없어?” 호적등본의 엄마 부모성명 란에 ‘나(羅) 씨’로만 기록되어 있는 걸 보고 할머니에게 물었다. “옛날에는 다들 ‘애기’라고 불렀지. 이름도 있었어, ‘순이’라고. 농사지어 먹고 사는 시골에서 가시나는 호적에 안 올려서 그렇단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던 그 외할머니는 고등학생 때 89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별로 고생하시지 않고 며칠 앓다가 편히 운명하셨다고 들었다.


AI로 인해 3천만 마리가 넘는 닭을 살처분해서 땅에 묻었고 계란 생산량이 30%가 줄었으며, 그 피해액 규모가 1조원에 달한다는 뉴스에 옛 생각이 떠올랐다. 과학과 의학이 이렇게 발달한 세상에서 그 많은 닭을 줄일 수밖에 없었을까. 왜 50년 전처럼 잡아먹으면 안 되었을까. 어차피 삶으면 바이러스는 다 죽을 테고, 엄마 말대로 뱃속에 들어가면 똥 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아마 그 답은 양계방식의 차이에 있을 것 같다. 옛날 우리집 양계장은 닭장이었다. 지금처럼 닭공장이나 계란공장이 아니었다. 5~60평정도 되는 땅에 비닐로 가건물을 짓고 선반을 만들어주었다. 닭들은 이쪽 구석에서 3층 선반 저쪽 구석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 움직일 수 있었다. 수시로 닭똥을 치웠고 때때로 모레나 톱밥을 깔아주었다. 그래서 병든 닭을 먹고도 아무 일 없었으며, 지금같이 떼로 죽거나 죽여야 하는 일도 없었다. 제주에서 동네길을 걷다가 양계장 옆을 지날 때가 있다. 까만 비닐천으로 높게 지어진 양계장 안 어슴푸레 보이는 닭들은 움직일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먹고 싸며 살찌우는 일과 알 낳는 일만 허락된다. 바이러스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양계’하면 생각나는 분이 또 있다. 바로 김수영 시인이다.


나날이 늘어나는 사료의 공급을 하는 일이 병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인제 석 달만 더 고생합시다. 닭이 알만 낳게 되면 당신도 그 지긋지긋한 원고료벌이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돼요.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하는 여편네의 격려말에 나는 용기백배해서 지지한 원고를 또 씁니다. 그러나 원고료가 제때에 그렇게 잘 들어옵니까. 사료가 끊어졌다, 돈이 없다, 원고료는 며칠 더 기다리란다, 닭은 꾹꾹거린다, 사람은 굶어도 닭은 굶길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여편네가 돈을 융통하러 나간다… 이런 소란은 끊일 사이가 없습니다. 난리이지요. 우리네 사는 게 다 난리인 것처럼 난리이지요. (<김수영 전집 2> '산문' 43쪽, 기사 보기)


사람은 굶어도 닭은 굶길 수 없었던 시대, 닭 모이 때문에 돈을 꾸러 다녔던 시대, 사료를 아끼려고 사료와 함께 풀을 잔뜩 섞어 주었던 시대,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시절을 그리워하다가 죽을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르겠다. 계란과 닭까지도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우리 아날로그 인생들에게는.


<후기>

국민학교 소풍 가서 엄마가 정성스럽게 싸준 보따리를 풀면 삶은 계란 두 개가 소금과 함께 꼭 들어있던 생각이 납니다. 그시절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의 어미는 자식들의 몸보신에 날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아침마다 코피를 쏟고 어지럼을 느꼈던 어린 시절, 엄마는 날계란을 주었을지언정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지는 않았습니다. 도시락 뚜껑을 열면 노랗게 덥힌 프라이가 부러웠던 시절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기억 때문에 최근까지도 계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HDL 콜레스테롤에 계란이 좋다는 것을 알고 요즘에 먹을 뿐입니다.


어쩌다가 계란을 수입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요? 몇 백만 개의 계란이 미국에서 비행기에 실려 온다고 합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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