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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두맹이골목에서

6년을 제주에서 살았으면서도 이런 골목이 있는지 몰랐다. 마치 어릴 때 살았던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3가의 60년대 뒷골목과 흡사했다. 다른 것은 흙바닥이 아니라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라는 것뿐, 차 한 대 들어설 수 없는 좁은 골목하며 구불구불한 길도 먼 기억 속의 그곳과 아주 흡사했다.


다른 길과는 다르게 좁은 도로 한 가운데는 1미터 정도의 폭으로 주황색이 칠해져 있었으나 예사롭게 지나쳤다. 그러나 며칠을 근처에 머물면서 그곳이 관광코스라는 걸 절로 알게 되었다. 제주에는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사설 테마파크가 있다. 6~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낯익은 장소와 소품들을 전시해 놓은 곳으로 당시의 향수를 달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꾸민 곳인데 반해, 이곳은 그 옛날의 모습을 자연적으로 간직한 곳이었다.


비교적 옛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인 건입동의 한가운데 자리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워낙 인구밀도가 낮았던 탓에 제주에는 곳곳에 개발할 공간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 특유의 현무암으로 된 돌담과 돌집들이 그대로고, 볏짚을 엮어 얹었던 초가 지붕만 현대식 기와로 바뀌었다. 집 내부도 현대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 등으로 개량되었지만 외부 골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4~50년 전에는 제주에서 가장 좋은 주택들이 즐비한 부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에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이 있다면 제주에는 건입동 두맹이골목이 있는 셈이다. 제주에서도 이곳을 관광지로 염두에 두고 집의 담에 벽화를 그려넣고 홍보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6년 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고 전혀 몰랐다. 아마 몇 미터 떨어진 도로는 수 백 번도 더 지났을 것이지만.


아주 간혹 - 하루에 한두 차례 정도 -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며 내가 작업하는 근처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제서야 나도 주위를 관심있게 둘러보게 되었다. 수많은 스푼을 벽에 붙여 고래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곳이 바로 내가 자리잡은 곳의 머리 위에 있었다. 벽화는 내가 어릴 때 많이 보았던 낯익은 모습들이었다. 말뚝박기 놀이를 하고 술레잡기, 딱치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머리 속은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차 한 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골목은 또래 아이들로 가득했고 컴컴해질 때까지 시끌시끌하게 놀았다. 두셋이 모이면 딱치치기, 서넛이 모이면 술레잡기, 예닐곱이 모이면 편을 갈라 다방구라고 불리던 게임을 하며 뛰어다녔다.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에도 아이들 속옷은 땀에 젖었고, 짧은 해가 아쉽기만 했다.


밥 짓고 생선 굽는 냄새가 한창이면 여기저기서 엄마들이 아이들 이름을 불렀다. "순철아, 빨리 들어와서 밥 먹어!" 그 소리는 곧 정겨운 욕설이 섞인 협박으로 변했다. "야, 이 새끼! 너 빨리 안 들어오면 혼날 줄 알어!" 그제서야 아이들은 하나 둘 짙은 남색 빛에 잠긴 집으로 사라져 갔다. 그렇듯 사람 사는 냄새와 악쓰는 소리에는 우리 집도, 젊었던 내 엄마의 목소리도, 내 이름도 섞여있었다.


어쩌다가 나는 50년이 지난 지금 이 낯선 골목에 앉아 그 낯익은 풍경을 떠올리고 있을까? 고등어 굽는 냄새, 왁지지껄한 소리, 익숙한 모습들이 눈앞에 보였다. "장형, 다음에는 네 발 짜리가 필요하우다!" P의 우렁찬 목소리에 눈앞에 있던 모습도, 소리도, 냄새도 사라졌다.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온 현실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모습은 벽에 그려진 그림에만 존재했고 적막만 감돌았다.


늦가을녘 북쪽 바다를 향해 경사진 이곳에는 해가 유독 짧았다. 날이 흐리기라도 하면 4시인데도 컴컴해졌다. 노란색 유치원 차량이 어린아이 하나를 내려놓고는 이내 사라졌다. 하얀 승용차가 멈추자 교복을 입은 학생이 내려 골목 안 풍경 속으로 잠겼다. 그게 내가 본 전부였다. 그것은 익숙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아주 낯선 곳이었다. 상상 속에 잠깐 누렸던 즐거움은 현실에서 아련한 아픔으로 남았다.


아, 나는 이방인이었다. 잠시 몇 백 광년 떨어진 어느 별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한 이민자로 살아갈 뿐이다. 내가 정착할 곳은 정녕 어디에도 없었으며 어디에도 있었다. 용산구 한강로, 영등포구 신길동, 경기도 화전, 한남동, 방이동, 분당, 뉴질랜드, 뉴저지, LA, 제주도. 지나쳤던 그 모든 곳은 다른 듯 같은 곳이었고, 같은 듯 다른 곳이었다.


이제 일어나 툭툭 털고 내가 살고 있는 별로 돌아갈 시간이다. 내가 남긴 쓰레기를 치우고 흔적을 지워야 한다. 그래야 멀고도 먼 별에서 온 외계인이 이곳에 잠시 머물다 갔다는 것을 두맹이골목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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