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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성공적으로 나이 들기 (2)

주관적인 편견이나 오해 없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책을 통해 새삼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조차 그릇되게 알고 있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예를 들어, 베일런트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책에 수록하고자 편지를 보냈다. 그에 관한 사연을 책에 포함해도 되는지 승낙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편지를 받은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며(Wrong person) 반송했다. 30년 전에 인터뷰하면서 직접 들은 사연인데도 그는 까맣게 잊는 것을 넘어, 자신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니라, 현재의 바뀐 상황이 과거의 기억까지도 왜곡한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사람도 다른 사람이 된다는 주장은 그럴 듯하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재미있던 시간이 '윤리' 과목이었다. 그때 배운 것 중에서 영국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4가지 우상' 이론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왜곡된 사고와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는 사유를 분석한 것으로, 400년 전에 살았던 천재 철학자의 통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적용된다.


앤서니 피렐리는 '이너시티' 그룹으로 빈한한 이태리 이민가정의 8남매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교육을 받지 못해 영어를 읽지 못할 뿐 아니라 쥐꼬리 월급조차 술로 탕진하는 공장 노동자 아버지, 조울증으로 가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엄마, 콧구멍만 한 비좁은 아파트, 샤워기도 욕조도 없이 하나뿐인 화장실 등 그는 어릴 때부터 인생에 위협이 되는 모든 조건을 가졌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는데, 여동생과 함께 어렸던 탓으로 폭력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화 속에 싸움을 일삼던 부모가 이혼한 13살 무렵, 앤서니는 아버지를 따라갔지만 그가 결석을 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1941년 다섯 명의 면접원들이 앤서니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기록이다.


- 보스턴의 웨스트엔드 빈민가의 앤서니 집은 난방도 없이 다 쓰러져가는 5층짜리 공동주택은 들어가 보기조차 싫은 궁핍 그 자체였다. 가정의 아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아이들의 행색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했다.


-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을까봐 잔뜩 긴장한 채, 두려움 속에 떨고 있었다. 소년은 유순해 보였으며, 제 딴에는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듯했으나 결코 자연스런 모습은 아니었다. (이하 중략)


57년이 지난 1998년 일흔 살이 된 앤서니는 다섯 번째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은퇴한 뒤, 보스턴에서 최고급 고층 아파트에서 면접원들을 맞이했다. 밝은 색 테니스 셔츠 차림의 앤서니는 플로리다에 있는 겨울별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마음속의 고통스런 유년기는 대부분 긍정적 추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여인'으로, 아버지를 '훌륭한 가장'으로 기억했다.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어서 아이들과 대화할 수 없었기에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말았던 거예요.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는 엄마는 아이들 숙제를 도와줄 수도 없고, 해줄 일이 별로 없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버지는 근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꿀 줄 아는 분이었지요. 자식들에게 매를 댄 것은 자신의 실패를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을 겁니다. 나와 여동생은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나와 여동생이 자랐을 때는 세월이 좋아져서 그랬을 거예요. 형들이 자랐을 때는 훨씬 더 어려웠으니까요. 세월이 약 아니겠어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아버지의 영향이 아주 컸어요.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무능을 닮고 싶지 않아서, 야망을 인생의 목표로 정했으니까요" "지난 세월 가장 절친했던 친구는 바로 아내입니다. 어느 정도냐고요? 누가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은 따라 죽을 정도입니다." 그는 심장마비를 앓았고 심장절개수술도 받았다. 따라서 건강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었으나, 그는 아픈 줄 모른다며 자신의 건강은 좋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다.


성인발달연구가 의미 있는 것은 '전향적(前向的, Prospective)'이라는 것이다. 어떤 가설이나 결과를 설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그 기록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결과를 추론했다. 물론 하버드나 빈민가 출신들이 혹은 천재 여성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인간이란 개체의 일부분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래서 베일런트는 자신의 진행하는 연구를 이렇게 표현했다. "과학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숫자로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진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애잔하고, 학술지에만 실리기에는 영구불멸의 존재다."


그는 선입관이나 주관적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 어떤 대상자도 같은 면접원이 두 번 만나지 못하게 배려했으며 면접원들이 대상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도록 사전정보를 차단했다. 앤서니 피렐리의 예 하나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왜곡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책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상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코올중독자에 대한 평가도 아내와 자식, 주위 사람들은 서로 다르다.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다 경찰서 유치장을 드나들다가 술 때문에 사망한 사람을, 술은 자주 마시지만 대부분 와인 한 병 정도일 뿐이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는 아내의 말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도 아내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딱히 반박하기도 힘들다.


자못 억지를 부리는 사람을, '한양 안 가본 사람이 가본 사람을 이긴다.'라는 속담으로 빗대곤 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 이 말은 진실일 수 있다. 서울에 가본 사람은 자기가 본 것만 서울이라고 생각할 소지가 다분한데 비해, 가본 적이 없으나 궁금한 사람은 서울에 대한 책을 읽거나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아니면 인터넷을 밤새도록 뒤져 볼 수도 있다. 과거처럼 정보를 구하기 어려운 세상도 아니지 않는가.


이 논리를 확대 적용해 본다. 미국교포가 모처럼 한국을 방문해서 서울의 잘 사는 친구 집에서 며칠 지내다 갔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가족과 친구들에게 한국에서 본 이야기를 전한다면 그의 말이 한국에 대해 정확하게 표현한 걸까. 아닐 것이다. 그의 말은 과거에 살았던 한국과 서울의 부자 친구 집에서의 경험을 말한 것일 뿐으로 한국의 현재 모습 일부만을 한국전체의 실상으로 전하는 것이다. 한국의 수준 높은 생활을 영위하면서 '헬조선' 운운하는 젊은이들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는 일일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헬조선을 말하는 젊은이들의 인생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그런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과 단 한 번이라도 터놓고 대화한 적은 있는 걸까.


사람들에게 편견이나 왜곡된 생각을 심어준다고 베이컨이 주장하는 편견의 원인은, 종족의 우상, 시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 4가지다. 내 부모라고 해서, 혹은 자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봐서는 안 된다. 지지하는 이유가 같은 고향, 같은 학교 때문이라면 잘못이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네팔의 젊은이를 대학을 졸업한 한국의 젊은이와 비교하는 것은 모순이다. 'Better Life'는 특정한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추구하는 욕구이자 동등한 권리다. 이 정도로 잘 살면 충분하니까 'Better Life'에 대한 노력을 멈추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다.


며칠 전, (무례하게도) 글에 대한 혹평과 함께 글벗에게 보냈던 이메일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 글쟁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것, 믿어온 것, 봤던 것, 들었던 것, 배웠던 것을 부수고 파괴해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빌드업한 시각으로 다시 보는 것이 바로 글쟁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후기>

조지 베일런트는 정신과의사이기에 앞서 훌륭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애잔하고, 영구불멸의 존재라는 그의 표현은 학자나 의사라기보다는 시인에 가깝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Aging Well'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미국의 언론은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 Surprising Guideposts to a Happi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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