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으로 나이 들기 (1)

금년을 시작하면서 ‘행복’을 화두로 삼았던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8월 말로 접어들며 가을의 문턱으로 성큼 들어섰다. 이틀 사이에 하루 최고 기온이 12℃(22℉)나 떨어져서, 더웠던 게 언제였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렇듯 간사한 게 인간의 마음이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 열리는 즈음에, 년초에 화두(관련 글1, 관련 글2)로 삼았던 ‘행복’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책을 만났다. 하버드 대학교 의대 조지 베일런트(George E. Vaillant) 교수가 2002년에 펴낸 ‘행복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하버드 대학교 성인발달연구’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원제는 ‘Aging Well’과 ‘Study of Adult Development’로 ‘행복의 조건’이란 제목은 책을 팔아먹기 위한 엉터리다. 원제의 적당한 한국말 찾기가 쉽지 않더라도, ‘잘 늙어가기’, ‘성공적인 노화’, ‘행복한 나이들기’ 등이 책의 내용과 맞지, ‘행복의 조건’이란 제목은 아무래도 조금 지나쳤다. 아마도 서점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책을 팔기 위한 출판사의 술책이리라.

몇 페이지를 읽은 책의 첫 소감은, ‘역시 미국은 대단한 나라’라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평생을 관찰할 구상을 했을까? 그것도 한두 사람도 아닌 수 백 명이나 되는 집단을 일일이 관찰하고 분석해서, 가족과 성장과정이 노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수 십 년의 연구과제로 삼았다는 발상 자체가 놀라웠다. 허황돼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프로젝트는 거액을 기부한 스폰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연구를 지원하는 스폰서가 있는 미국은 참 대단한 나라다. 그리고 이 책은 연구 70년 만에 연구 책임자가 펴낸 중간 결과다.

의과대학에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통상적으로 환자를 위한 것으로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방법인데 반해, 이 연구는 건강한 사람들을 7~80년간 추적 조사하여 인생에 대한 학술적 이론과 결론을 끌어내고자 한 것이니, 회원 대부분이 5~60대 이상인 우리 카페에 가장 어울리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진행 중인 연구라고 하지만, 며칠이 걸리더라도 이 책을 정독해서 연구가 주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깨닫고, 그것을 회원님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저자 George E. Vaillant

1934년 생으로 뉴욕의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연구 책임자가 노령으로 사망한 1960년대 후반부터 총책임자가 되어 현재까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뉴욕 자연사 박물관장이었던 베일런트의 부친이, 1945년 특별한 이유 없이 권총 자살하는 사건에 영향을 받아 하버드에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으며, 그런 인연으로 프로젝트 총책임자가 되었다.

베일런트 박사가 죽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프로젝트를 맡아 연구를 계속할지 모른다. 연구 대상자가 모두 사망할 때까지.

연구대상 집단 - 총 814명

- 첫 번째 집단은 1920년대 태어난 268명의 하버드 대학 졸업생으로, 당시 사회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수준 높은 사회적 혜택을 받은 그룹이다. 1930년대 말 2학년 재학생 중에서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 책이 나올 무렵에는 대부분 80대로 상원의원을 지낸 사람이 4명이나 있었다. John F. Kennedy 대통령도 대상자의 한 명이었다. 스폰서의 이름을 따서 그랜트 집단이라고 부른다.

- 두 번째 집단은 1930년대 출생한 이너시티 출신 고등학교 중퇴자 456명으로 사회적 혜택을 거의 받은 적이 없는 블루칼라 그룹이다. 도시 빈민가를 의미하는 ‘이너시티’는 여기서 보스턴 중심가의 빈민 아파트 거주자를 뜻한다. 처음 연구에는 포함되지 않았다가, 연구 도중에 범죄를 연구하는 다른 팀에서 명단을 받아 조사대상에 포함시킨다. 이들을 이너시티 집단으로 칭한다.

- 세 번째 집단은 1910년대 태어난 지적능력이 뛰어난 중산층 여성 90명으로, 스탠포드 대학의 터먼 교수가 진행하는 천재아동 연구에서 이들을 넘겨받는다. 140 이상의 아이큐를 가진 여성집단의 인생이, 성차별이 뚜렷했던 시기에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변하는지 추적 조사한다. 이들은 터먼 집단으로 불린다.

조사방법

2년마다 설문지 조사, 5년마다 건강검진, 15년마다 조사원들이 일일이 방문해서 면담했으며, 인터뷰에는 이들의 아내나 자녀들은 물론 이웃이나 관계자들까지 포함했다. 대상자들의 대부분은 이런 조사나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고 한다. 베일런트 교수는 행운이었다는 말로 감사함을 표시했다.

주요성과 요약

70년 동안 연구해서 찾아낸 성과로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결론이다. 인생을 웬만큼 살았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학술적으로 증명했다는 것과 막연한 생각을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립했다는 것 정도라는 것이 개인적인 소감이다.

베일런트 박사가 연구에서 찾아낸 숱한 주요 성과를 요약한 것이라며 소개한 6가지는 아래와 같다. (책 49쪽)

● 우리에게 일어났던 나쁜 일들이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노년은 우연히 만난 좋은 사람들 덕분에 보장되기도 한다.

● 인간관계의 회복은 감사하는 자세와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이루어진다.

● 50세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면 80세에도 행복한 노년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50세에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다고 해서 80세에 반드시 건강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 알코올 중독은 - 불행한 유년시절과는 상관없이 - 분명 실패한 노년으로 이어진다. 알코올 중독은 부분적으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을 가로막는 장애이기 때문이다.

● 은퇴하고 나서도 즐겁고 창조적인 삶을 누려라. 그리고 오래된 친구를 잃더라도 젊은 친구들을 사귀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수입을 늘리는 것보다 한층 더 즐겁게 살 수 있다.

● 객관적으로 신체건강이 양호한 것보다 주관적으로 건강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성공적인 노화에 훨씬 더 중요한 요소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자신이 병자라고 느끼지 않는 한 아프더라고 남이 생각하는 것만큼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은?

베일런트 박사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노후를 예측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조건을 꼽았다. 성숙한 방어기제,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금주, 운동, 알맞은 체중이 그것들인데, 일곱 가지 중에서 대여섯 가지를 50대에 충족했던 대상자들의 절반 이상이 80세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였던 반면에, 세 가지 이하만 충족했던 대상자들은 80대에 건강과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숙한 방어기제'라는 것이다.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란 의학적 용어는 인체가 상처나 질병에 반응하는 방식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인생에서 마주치는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을 뜻한다. 예를 들어 몸에 생긴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공기 중에서 응고하여 출혈을 멈추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키지만, 같은 방어기제가 혈관에서 발생하면 뇌졸중이나 심장마비로 이어지는 것처럼, 고통에 대한 방어기제가 행복한 노후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방어기제에는 4가지 종류가 있다. 정신병적(Psychotic)이거나, 미성숙(Immature)하거나 아니면 신경증적(Neurotic)인 방어기제는 불행한 노후로 이끈다.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이나 도전에 성숙하게 대응할 때만이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 박사의 주장이다.

<후기>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메모해 가면서 정독하느라 아직 100페이지도 못 읽었지만, 시간 나는 대로 읽어서 찾아낸 의미를 요약해서 전달하겠습니다. 물론 직접 책을 구입해서 읽을 형편이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형편이 되는 분들에게는 일독을 권합니다.

젊었을 때 만난 나이 든 분들은 대부분 높은 지위에 있어서, (사회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억지 강요로)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는 언제 나이가 들어 저렇게 되지!'하고 생각할 때가 없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그분들은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50이 넘으면서부터입니다. 젊음이 그렇게 좋은 것인 것을 이렇게 뒤늦게서야 절실하게 깨닫고 있으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셈입니다, 하하하.

오늘 제주 날씨는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다.